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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여성 70명 울린 ‘박인수 사건’ 유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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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6일 위헌 결정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혼인빙자간음죄는 한국 사회 ‘성 담론’의 변화를 관통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인물이 ‘주연’으로 등장해 당대의 성 풍속을 증언했던 것이다.

1950년대에 여성의 정조 문제를 공론의 장에 올린 것도 혼인빙자간음 사건이었다. 1955년 벌어진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사진) 사건이 그것이다.

20대였던 박씨는 당시 유행하던 댄스 홀을 드나들면서 70여 명의 미혼 여성과 성관계를 가진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게 됐다. 피해자 중에 유명 여대 재학생과 고위층 자제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박씨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내가 관계한 여성 가운데 처녀는 단 한 명이었다”는 파격적인 발언을 했다.

박씨의 공판에는 방청객 수천 명이 몰려 법원 유리창 수십 장이 깨지기도 했다. 1심 법원은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이 판결은 항소심에서 뒤집혔고,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보수적인 성 문화가 최초로 도전을 받은 사건이었다.

70년대와 80년대에는 의사와 사법연수원생 등이 혼인빙자간음죄로 고소를 당하는 일이 세간의 화제가 됐다. 뒷바라지를 해준 여성과 그 가족이 ‘성공한 남성의 변심’을 문제삼는 것이 전형적이었다. “고위 공직자의 아들”이라거나 “일류대 학생”이라고 속여 성관계를 맺고 돈을 뜯어낸 뒤 구속되는 사례도 잇따랐다.

90년대 이후엔 유명인들의 이름이 뉴스에 나왔다. 진실이 무엇인지와 관계없이 당사자가 명예를 잃는 경우가 많았다. 93년엔 한 정당의 대표 최고위원이 혼인빙자간음 사건에 휘말렸다. 해외 유명 대학의 석사 출신인 30대 여성이 “6개월간 동거하며 결혼을 약속했다”며 60대의 정치인을 고소한 것이었다. 정치인이 맞고소하면서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2001년엔 인기 가수가 경찰에 의해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억대의 금품을 뜯어내고 폭력까지 휘두른 혐의를 받은 그는 이후 연예계에 돌아오지 못했다. 축구·야구 등 인기 스포츠 스타나 소설가도 혼인빙자간음 혐의로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하지만 혼인빙자간음죄는 일반 국민의 일상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기소된 사람은 81년 269명에서 지난해 25명으로 줄었다. 27년 만에 10분의 1 수준이 된 것이다. 법무부가 92년 혼인빙자간음죄 조항을 폐지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기도 했으나 논란 속에 개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검찰의 처벌 수위도 낮아져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는 경우가 늘었다.

대법원 역시 적용 범위를 좁혀갔다. 대법원은 2002년 9월 “‘혼인하자’는 말로 핑계를 댄 일이 한 번이라도 있었다고 해서 바로 혼인빙자간음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정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하지만 헌재는 2002년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 합헌 결정을 했다. 당시 재판부는 “남성이 계획적으로 접근해 결혼을 무기로 성을 편취한 것은 사생활 영역의 자유로운 성적 결정의 문제라거나 비도덕성의 차원을 넘어선 것으로 국가의 형벌권이 개입할 부분”이라고 밝혔다.

불과 7년 후 헌재가 입장을 바꾸게 된 데는 ‘보호 대상’이었던 여성들의 생각이 바뀐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여성부는 지난 9월 처음으로 ‘위헌’ 의견을 냈다. “혼인빙자간음죄는 ‘여성은 정조 또는 처녀성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여성만을 피해자로 보는 것도 남녀 평등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김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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