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일상에서의 숨 고르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말을 붙이면서 살펴봤더니 그 일본 남학생은 ‘도쿄외국어대학’이라고 새겨진 운동복을 입었다. 마침 잘됐다 싶었는데 이 학생은 대답에 어려움을 느끼는 듯이 보였다. 지도를 꺼내 들고 이모저모 물었더니 그는 말을 많이 더듬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트랙을 안내하나 싶었는데 그는 아예 기차에 올랐다. 그는 손가락으로 내가 갈 행선지를 가리키면서 “함께 가겠다”는 뜻을 표했다.

그와 동행하면서 “명색이 외국어대학생이 영어에 무척 서투르구나”라고 생각했다. 이심전심일까…그는 자기 옷에 작게 새겨진 다른 글자들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거기에는 ‘체육학과’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운동선수로 학교를 들어가 영어와 거리가 있었다는 생각이 그때서야 들었다. 동양에 살면서 영어를 못할 수도 있는데…. 내심을 들킨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의구심을 떨치고 나니 그와의 의사소통이 편해졌다. “외국어대학에 다니지만 외국어는 서툴다. 휴일이지만 훈련 때문에 학교에 다녀오는 길”이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환승역에 내렸다. 그는 갈아타야 할 트랙까지 길을 안내하면서 거쳐가야 할 정거장 수를 손가락으로 꼽아 주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아까 우리가 만났던 역으로 다시 돌아가야 된다고 말했다. 아니 이런. 그는 내게 길을 알려주기 위하여 자기 집과 방향이 다른 길을 한동안 왔던 것이 아닌가.

그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나는 수없이 길을 물었고 또 수없이 길을 가르쳐줬지만 이방인을 위해서 이런 정도의 친절을 베풀지는 못했다. “누가 네게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라”는 경전의 말씀을 이 가을에 객지에서 겪다니…. 누가 어디를 가자고 하면 ‘할 일이 많은데’라며 모면하고 시간에 인색함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온 내게 도쿄의 청년은 신선함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나는 아프자고 해도 아플 시간이 없을 만큼 ‘바빠 죽는’ 도시의 삶을 살면서 여유도 느낌도 다 잃고, 정교한 ‘시간차 공격’을 퍼붓는 배구선수처럼 빼곡히 들어찬 일정을 오가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쩌다 일에서 놓이면 “이러고 있어도 되나. 뭘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까닭 모를 불안에 시달린다.

면역학을 전공하는 친구는 일상에서의 숨 고르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심신의 압력이 임계점에 도달, 갑자기 터지지 않도록 평소에 숨을 골라 몸과 마음의 평형을 유지하라고 권한다. 옳거니 여기면서도 실천에 잘 옮겨지지 않았다. 일하면서 놀고, 놀면서 일하는 다층구조가 바람직스러운 이상이라지만 현실은 쉬거나 노는 시간을 벌기 위해 엄청난 강도의 노동을 요구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의 연속 속에서 언제 어디쯤에서 김을 빼야 할 바를 모르는 채 세월은 쏜살같이 달린다. 그렇게 아득바득 살고 있는 나에게 도쿄의 운동선수 학생은 ‘10리를 가 줄 수 있는’ 삶의 여유와 지혜를 일깨워 준다.

전재경 자연환경국민신탁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