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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반론

시인이 뿔났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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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시인이 뿔났다. 몇 년 전엔 신경림 시인이 자신이 쓴 시에 대한 문제를 풀지 못해 뿔이 났는데, 이번에는 최승호 시인이 뿔이 났다. 그것도 단단히 난 모양이다. 오죽하면 문학교육의 가르침을 ‘가래침’이라고 했을까.

최 시인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내가 쓴 시가 나온 문제를 풀어 봤는데 모두 틀렸다”라고 하면서 “작가의 의도를 묻는 문제를 진짜 작가가 모른다면 누가 아는 건지 참 미스터리”라고 개탄하고 있다.

하지만 자기 시에 대한 문제를 못 풀었다고 문학교육의 가르침을 ‘가래침’이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섣부르다.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문제만 풀고 있지는 않다. 선생님들은 시에 담긴 내밀한 의미를 학생들에게 울림으로 전하고자 하고, 학생들은 이를 통해 삶의 의미 혹은 시대적 현실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최 시인의 ‘북어’를 가르칠 때는 하다못해 꼬챙이에 꽂힌 북어 사진이라도 보여줄 것이고, 학생들은 꿰어진 북어가 던지는 말을 떠올리며 엄혹했던 1980년대를, 혹은 죽음의 탐구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최 시인이 개탄해 마지않은 그 시험 문제는 문학 수업의 아주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수능 역사 15년 동안에 최 시인이 비판한 문항, 즉 ‘시의 사조(思潮)가 뭐냐. 시인은 어느 동인 출신이냐’고 묻는 문제는 단 한 문항도 출제된 적이 없다. 5지선다형이라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수능에서는 문학 작품에 관한 단순 지식이 아니라 작품 이해 능력을 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필자는 2000년 수능시험 본고사와 올해 6월 수능 모의고사의 언어영역 출제위원장으로 각각 일한 경험이 있다).

물론 시 작품을 객관식 시험으로 출제하여 난해한 문제 풀이의 대상이 되게 만들었다는 언론의 비판은 뼈아프다. 문학교육이 읽고 쓰는 것 자체를 즐기게 해줘야 한다는 지적도 옳다. 하지만 느끼고 즐기기 위해서는 알고 따져 봐야 한다. 알고 따지는 활동은 시 감상의 기초 체력을 다지는 훈련이다. 히딩크 감독의 즐기는 축구도 소위 ‘공포의 빽빽이’라고 하는 셔틀 런(shuttle run)으로 선수들 입에서 단내가 나게 할 정도의 체력 훈련을 시켰을 때 가능했다. 객관식 문제 풀이가 고통스럽긴 하지만 작품에 대한 정확한 이해 능력을 기르는 데 필요한, 알고 따지는 능력을 키운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최 시인이 자신이 쓴 시의 의도를 자신이 모른다면 ‘누가 아는 건지 참 미스터리’라고 지적한 것도 짚어 봐야 한다. 시를 가르칠 때 시인의 의도를 추리해 보는 것은 시의 의미를 좀 더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이 과정에서 시인의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추리될 수도 있다. 그래도 그것은 오독(誤讀)이 아니다. 시인이 미처 의도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의미가 ‘눈 밝은 독자’에 의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쓴 시에 대한 문제를 틀렸다고 해서 ‘문학교육은 가래침’이라고 한 것은 너무 했다. 오늘도 교단에서 눈 밝은 독자를 기르려고 애를 쓰는 수많은 국어 선생님들에게 내뱉는 가래침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어 선생님들이 뿔날 노릇이다.

김중신 국어교육학회 회장 수원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