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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칼럼] 신아시아 외교, 구호보다 내용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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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오바마보다 한발 앞서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는 더 직접적인 화법으로 일본의 ‘아시아 복귀’를 선언했다. 19세기 중반 메이지 유신 때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근대화 전략으로 아시아를 떠났던 일본의 관심을 아시아로 되돌리겠다는 하토야마의 비전은 그의 동아시아 공동체와 우애외교의 구상에 분명한 모습을 보였다.

미국과 일본의 이런 아시아 중시 외교는 중국과 일본의 부상으로 상징되는 아시아의 21세기라는 인식을 배경으로 등장한 것이다. 1989~90년 동유럽과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뒤 지난 20년의 세계질서는 미국의 일극체제로 유지돼 왔다. 그러나 유럽연합(EU)의 등장, 이라크·아프간 전쟁,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급성장은 미국의 단독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싱가포르의 전략가 키쇼어 마부바니는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사회주의 붕괴 직후 요란하게 선언하여 미국과 서유럽을 열광시킨 『역사의 종말』을 아시아가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었다. 확대 해석하자면 냉전의 종식은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역사무대의 아시아 이동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국이 아시아 국가 중에서 이런 신아시아 시대의 도래를 가장 민감하게 인식하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외교의 큰 그림을 제시한 것은 다행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3월 동남아 순방 중 자카르타에서 열린 공관장 회의에서 신아시아 외교를 처음으로 밝히고 6월 제주 한국·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서 그것을 확인했다. 이명박 정부의 신아시아 외교는 동북아·동남아·중앙아·서남아·남태평양의 다섯 권역을 묶어 하드 외교와 소프트 외교로 아시아라는 방대한 지역, 아시아 르네상스의 핵심지대에서 한국의 존재감을 확산시키고 강화하겠다는 비전에 바탕을 둔 것이다.

듣기에 흥겨운 참으로 야심 찬 구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너무 늦기 전에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신아시아 외교의 수단은 무엇인가. 1980년대 전두환 대통령은 아프리카를 순방하면서 남남협력이라는 것을 선언했다. 한국이 그동안 소홀히 했던 아프리카를 비롯한 개발도상국을 적극 지원해 한국과 그들 나라의 관계를 강화하겠다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의 남남협력 외교는 그의 귀국 후 바로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요란한 출생신고를 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한국 외교의 희극적인 단면이었다. 그때 전두환 정부는 남남협력을 가능케 할 수단에 대한 고려는 전혀 하지 않았다.

한국이 우리보다 발전이 늦은 나라와의 협력관계를 강조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논리가 발전 경험의 전수다. 한국의 70년대 고속성장은 분명히 개도국의 부러움과 벤치마킹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런 나라들은 한국이 발전 경험과 함께 발전에 필요한 원조까지 줄 것을 기대한다.

우리 사정은 어떤가. 한국의 공적개발원조(ODA) 총액은 8억 달러 정도다. 일본의 96억 달러와 비교된다. 8억 달러의 31%를 아시아에 배정한다고 하면 2억5000만 달러다. 일본의 96억 달러의 28%인 27억 달러와 경쟁이 될까.

한국 정부는 2015년까지 ODA를 30억 달러로 늘릴 계획이다. 30억 달러의 31%면 10억 달러 미만이다. 원조를 주는 우리에게는 큰 액수인데 과연 그것으로 동남아를 넘어 중앙아와 서남아, 남태평양까지 이해의 영역을 크게 넓힌 신아시아 외교의 수단으로 충분할까. 국회는 그런 규모의 ODA 증액을 받아들일까. 신아시아 외교가 아니라 지금까지 하던 대로의 아시아 외교를 하는 데도 외교통상부의 인력은 태부족인데 외교인력을 늘릴 준비는 돼 있는가.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다. 신아시아 외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운명이다. 화려한 수사나 구호보다 우리 능력에 맞는 수단의 확보가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원조예산을 짜는 정부 부처와 그것을 승인하는 국회의 전향적 자세, 아시아 신시대가 한국에는 단군 이래의 기회라는 국민 모두의 이해가 중요하다. 신아시아 외교는 미국이 띄우는 미·중 G2협력체제, 일본이 발의하는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타당성도 검토해야 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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