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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영어 공용화론의 배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영어를 제2공용어로 채택하자는 방안을 검토해보자고 하니까 대뜸 "우리가 식민지라도 된다는 말이냐" 라는 힐난이 들린다.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면 관공서와 법원.국회는 물론 심지어 각급 학교와 미디어에서도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사용토록 해야 하는데 이것은 위험천만한 발상" 이라는 반론도 들린다.

다소 성급한 반응들이다. 반대하기에 앞서 우선 영어를 제2공용어로 삼자는 것이 구체적으로 영어를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그리고 왜 그러한 제의를 하는지를 들어볼 일이다.

영어를 제2공용어로 채택하는 데 특정한 모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껏 제시된 바도 없다. 우리가 결정해 선택하기 나름인 것이다. '제2' 라는 수식어에 유의할 일이다.

영어를 제2공용어로 채택하자는 주장은 원래 올해초 일본에서 제기됐다. '21세기일본구상간담회' 라는 총리자문기구의 건의였는데 요지는 영어교육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도록 하고 그 한 방편으로 정부와 주요 공공기관이 각종 발간물(인터넷홈페이지 포함)을 일본어와 영어 두가지로 발행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 건의를 받아들여 오부치 총리는 일본 국회 시정연설에서 "21세기에는 누구나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회로 만들겠다" 고 밝힌 바 있다. 제1야당인 민주당은 10년내 영어를 제2공용어로 만들기 위한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국내의 논의도 실상은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에 자극받은 것인데 우리도 영어 제2공용어화를 추진하는 경우 일본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수준을 능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필자는 첫째, 정부 및 기타 주요 공공기관이 공식적 발간물을 우리말과 영어 두가지로 내놓게 하고 둘째, 일정직급 이상의 공무원에 대해 외국인과 영어로도 회의를 할 수 있고 또 영어문서를 제대로 기초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구사능력을 요구하는 것을 영어 제2공용어화의 뜻으로 생각해본다.

물론 단계적 접근을 전제로 한다. 어떻게 보면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조치들인데 그 실제적인 효과는 정부의 이런 조치가 민간부문과 사회 전반에 어떠한 변화를 파급시키고 또 정부가 보완적으로 영어교육의 개선을 위해 어떠한 조치들을 취하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영어 제2공용어화론의 근본적 취지는 국민들이 세계사회와 자유롭게 의사소통과 정보교환을 할 수 있게끔 하자는 데 있다.

일본 총리자문기구는 "글로벌리터러시" 라는 말로 이를 표현했다. 경제.정치.문화 모든 분야에서 국경이 급속히 무너져내리는 지금의 글로벌화시대의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각 개인과 조직도 세계 도처의 정부.기업.단체.전문가.개인 등과의 교류.교역 및 협력을 원활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세계사회와 효과적으로 신속하게 의사를 소통하고 정보를 교환해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글로벌시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기본적 요건의 하나라고 아니할 수 없다. 국제사회에 대해 우리의 투명성을 올려주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한 국제적 의사소통과 정보교환의 기초수단이 바로 영어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영어는 이제 우리말과 경쟁하는 외국어로 간주될 수 없다. 우리말을 보완해주는 국제어요, 글로벌화시대의 생존기술이 된 것이다. 영어의 이러한 기능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인터넷혁명으로 인해 더욱 굳어지고 있기도 하다.

이제는 우리 국민도 적어도 대륙의 유럽인들만큼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고서는 개인과 민족의 번영을 도모하기 어렵게 돼 가고 있다. 동남아에 이어 이제는 바로 이웃의 일본도 영어의 공용어화를 추진하고 있다.

기껍지는 않더라도 엄연한 현실이다. 이것을 외면해도 좋은가. 아니면 대안은 무엇인가.

영어를 제2공용어화하기로 한다 해도 매우 어려운 문제들이 제기되기는 마찬가지다. 그 하나는 영어의 제2공용어화를 뒷받침해 영어교육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개선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위협에 어떻게 대처하는냐 하는 것이다. 둘 다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의 제2공용어화를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하는 것, 이것이 글로벌화가 가져오는 딜레마인 것이다.

양수길<주oecd대사.경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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