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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당신 회사의 정치제도는 절대왕정?

중앙일보

입력

‘회사에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결정적 계기였죠.’ 입사 전에는 회사에 들어가기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 입사 직후에는 정말로 열정적으로 아이디어를 쏟아내면서 뭔가를 하려고 했다는 그. 그때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회의에 참석한 직장 선후배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채택돼 하려하게 꽃을 피우는 꿈을 자주 상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웬걸. 아이디어는 번번이 날개가 꺾였고, 선배들이 내놓은 허접하기 짝이 없는 아이디어가 채택되는가 하면, 회의를 주재하는 부장이 내놓은 아이디어는 무조건 채택하고 마는 ‘바보들의 행진’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심각한 좌절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 직장인 사춘기 증후군을 남들보다 앞서 경험하며 사표를 낼까 말까 고민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 날이 운명처럼 다가오고야 만 것이다. 그 날도 지루한 회의가 이어졌고,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가 난무하는 속에, 그도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꾹꾹 참고 있었다. 참지 않고 말해봐야 소용도 없었고.

그때 복도를 지나치시던 회장님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회의실로 쓰~윽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발딱 일어서는 부장을 제지시킨 회장님은 쉿! 하시면서, 슬그머니 뒷자리 의자에 앉으셨고, 회의를 계속 진행하라는 신호를 보내셨다.

장시간 답이 나오지 않아 안 그래도 답답해하던 부장은 당연히 속이 더 타들어갔을 터.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디어를 내보라는 눈짓을 연신 보내고 있었다. 아니 평상시에는 남의 아이디어를 잘도 죽이더니만, 오늘은 왜? 이런 반감도 들었지만, 못 먹는 감 씹어나 본다고, 문 대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2개월 전인가요? 회의 때에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이번 사업과 관련해서는, 어쩌구 저쩌구...’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지난번에 부장에게 ‘킬’ 당한 아이디어를 다시 한 번 되풀이해 말을 했고, 여전히 부장이 반대하는 속에, 양 차장까지 거들고 나섰는데, 갑자기 끼어드시는 회장님. ‘그 아이디어 좋습니다!’

이 한마디에 ‘민주적 절차에 따라’ 또 다시 ‘킬’ 당할 뻔했던 아이디어가 되살아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날 회의를 마치고 유쾌 통쾌 상쾌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문 대리. ‘히야, 이게 정말 파워라는 거구나!’ 하는 걸 깨달았고, 그날부터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무조건 회장님의 눈에 들기로. 그 분의 눈에 띠기로.

‘저도 학교 다닐 때 학생회 활동도 해봤고, 민주주의 참 좋아하는데요. 회사에서는 헛된 꿈일 뿐이더라고요. 회장님 한 마디에 부장이 결정을 번복하는. 한마디로 회사는 절대왕정입니다. 절대왕정!’ 어떤가? 여러분도 동의하는가? 난? 동의한다.

문 대리의 유일한 취미는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이다. 요즘은 연속극 중에서도 사극을 열심히 본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극 속 이야기가 결국 회사 속 이야기라는 것이다. 롤플레잉게임에서도 회사 내에서 세력을 키워 생존하는 지혜를 배운다고 한다. 왜 사람들이 사극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지, 왜 게임에 빠져드는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회사가 절대왕정이라는 말은 조금은 과장 섞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회사에 민주주의가 없다는 것은 미국의 사내 정치 전문가들도 지적하는 바다. 미국처럼 민주주의가 일상화된 곳에서도 회사 내에서 민주주의가 잘 관철되지 않을 정도라면, 우리나라처럼 권위주의 문화의 뿌리가 깊은 곳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회사마다 상황은 다르다. 공기업과 사기업이 다르고, 사기업 중에서도 지배구조에 따라 회사 유형에 따라 차이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화시키기가 어려운데, 그래도 범주화해서 분류해본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래 도표에서 여러분이 다니는 회사는 어디쯤 해당할지 한번 짚어보기 바란다.

여기서 한 가지, 여러분 중에는 왜 공기업과 공공기관이 더 민주적인지에 의문을 갖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을 때 윗분이 사석에서 이런 말을 내게 해준 적이 있다. ‘공무원이 좋은 게 뭔지 압니까? 얼굴 모르는 사람에게 월급을 받는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나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는데, 공무원은 최상위층부터 최하위층까지 모두가 국민으로부터 월급을 받기 때문에 조직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고, 그래서 아무리 고위직이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아래 사람을 퇴직시키는 행위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키는 대로 일을 하지 않을 경우에 근무평정 등에서 불이익을 줄 수는 있지만 ‘그만 두라고’ 말할 수 없는 구조. 그 구조 덕분에 서기관이 중심이 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공공기관에서는 장차관도 서기관의 의견을 무시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사기업에 비해 더 민주적인 의사결정 체제를 갖추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 여러분이 다니는 회사의 정치제도를 점검하고 난 후에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잘 알 것이다. 그곳에서 그만둘 요량이 아니라면, 여러분이 누구의 힘을 업어야 할 지, 누구와 힘을 합쳐야 할 지, 심지어 어떤 수위와 톤으로 맞설 것인지도 대강 답이 나올 것이다.

이종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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