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방] 늦깍이 시인 임영조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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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늦깍이 시인 임영조(55)씨는 털털하고 푸근하고, 조금은 느린 충청도 사람이다. 그의 시도 그래서 누구든지 쉽게 다가갈 수 있다.

그는 시를 쓰기 위해 사당동 시장통 뒤쪽 주택가에 작은 방을 얻어 6년째 출퇴근하고 있다. 복잡한 시장통을 지나 10분쯤 골목을 헤집고 가다보면 가파른 언덕을 등지고 늘어선 벽돌건물들. 4층 건물의 2층 일부를 임대해 사랑방처럼 꾸몄다. 12평을 반으로 나눠 입구쪽은 소파를 둔 응접실로, 뒤쪽은 서재겸 집필실로 개조했다.

'이소당(耳笑堂)' .귀가 웃는 집이란 뜻의 당호(堂號)를 쓴 액자가 첫 눈에 들어온다. '이소' 는 지난 65년 서라벌 예전 재학시절 은사인 미당(未堂)서정주선생이 지어준 호(號). 당시 임씨는 '글 잘 쓴다' 는 칭찬을 한 번도 듣지못했다.

대신 미당의 어린 술친구로 선술집에서 자주 술시중을 들었다. 술 취한 미당이 어린 제자가 내민 '시학입문' 이란 책의 첫 페이지에 호를 써주면서 말했다.

"귀가 참 잘 생겼어. " 임씨의 스승은 쟁쟁한 사람들이다. 처음 시를 가르친 스승은 '껍데기는 가라' 로 유명한 저항시인 신동엽이었다. 충남 보령에서 중학교를 다닐 무렵 초임으로 부임한 신동엽선생은 지리담당이었지만 정작 수업시간엔 시를 가르쳤다.

그가 시를 써 보이면 스승은 "다 좋은데, 요것만 고쳐라" 하며 되돌려주곤 했는데, 나중에는 처음 썼던 표현을 찾기 힘들 정도로 뜯어고쳐야만 했다. 어지간한 사람이면 글쓰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임씨는 6개월간 입산, 절에 머물면서 시 쓰기에만 전념했고 마침내 70년 '월간문학' 과 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등단은 했지만 주목받지는 못했다. 결국 74년 태평양화학에 취직, 샐러리맨으로 살아야했다. 그러다 92년 '갈대는 배후가 없다' 라는 시집이 비로소 독자와 시단의 주목을 끌었다. 94년 소월시문학상을 받는 자리에 축사를 위해 나온 미당이 임씨를 끌어안고 말했다.

"이제 됐다, 됐어. " 처음으로 스승의 칭찬을 받은 그는 그해 연말 사표를 내고 사당동에 작업실을 꾸몄다.

"나이 50을 넘기면 더이상 시를 쓸 시간이 없을 것 같더군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동안 정말 좋은 시만 쓰고 싶어요. "

그는 '95년.97년에 이어 '등단 30년을 맞아 6번째 시집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 를 내놓았다. 지천명(知天命)을 훨씬 넘긴 나이지만 이제 시작이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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