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만 대선 현지 르포] "바꿔" 분위기 확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선거가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대만에는 '불가전론(不可戰論)' '불가훼론(不可毁論)' 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다.

'불가전론' 은 "누가 당선돼도 결코 전쟁은 없다" 는 게 골자다.

'불가훼론' 은 "누가 당선돼도 경제가 망가지는 일은 없다" 는 내용이다.

국립대만대 법학과 학생인 장민융(張民勇)은 "독립파가 당선된다고 해도 중국은 절대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 고 잘라 말했다.

대만의 방위력이 만만치 않은 데다 미국과 일본이 '전략적 이해' 때문에 결코 대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에서다.

같은 대학 경제학과의 리추훼이(李楚慧.여)도 "천수이볜이 당선되면 경제가 망가진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대만 경제가 총통 하나 때문에 좌지우지될 규모인가" 라고 반문했다.

'불가전론' 과 '불가훼론' 은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후보의 발목을 잡아왔던 두 족쇄를 모두 풀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분위기는 17일 타이베이 시내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우선 陳후보 선거유세 차량이 부쩍 늘어났다.

부녀자.노인.학생들로 구성된, 이른바 '유세유람단' 이 거리 이곳 저곳에서 활보하는 것도 눈에 띄었다.

유세유람단에 낀 쉬(徐)라는 성을 지닌 70대 할아버지는 "이젠 대만을 대만인이 다스려야 할 때" 라고 말했다.

"리덩후이(李登輝)총통도 본성인(本省人.대만 출신) 아니냐" 고 반문하자 "그는 반쯤 훼절(毁節)한 본성인" 이라고 덧붙였다.

이제는 진짜 내성인, 곧 '대만의 아들(臺灣之子)' 인 천수이볜이 대만을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陳후보의 마지막 유세가 열린 중산(中山)축구장 옆 공터에서 만난 한 시민은 "오늘은 우리 가족 모두가 놀러나왔다" 고 말했다.

陳후보의 당선을 축하하는 소풍을 즐기고 있다는 얘기다.

또 다른 시민도 "천수이볜은 이미 대만의 총통" 이라고 말했다.

대세는 이미 결정됐다는 확신이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최근 대만정치연구소의 대만정치, 특히 양안관련 논문은 분석이 예리하고 논점이 정확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연구소는 최근 '대만인들의 정치의식과 양안관계' 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논문은 결코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런데도 민진당 陳후보의 당선을 예고하는 '예언서' 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논문이 제일 먼저 지적한 것은 '피로감' 이다.

국민당 통치가 반세기를 넘기면서 언제나 '상수(常數)' 로 남아 있는 정권에 대해 보수적인 대만인들이 마침내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 피로감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국민당 자신" 이라고 이 논문은 지적했다.

당을 쪼개고, 적임자로 쑹추위(宋楚瑜)를 옹립해 '국민당이지만 국민당이 아닌 세력' (무소속)을 형성한 것도 국민당내 핵심 세력이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대만 국민들의 피로감은 '새로운 국민당' 이라는 대증적.고식적 처방으로 치료되기 어려운 수준임이 점차 확인되고 있다" 는 게 이 논문의 지적이다.

무력위협으로 일관된 중국의 '북풍(北風)' 도 이 피로감을 증폭시켰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북풍으로 국민당 정권에 대한 염증을 새삼 확인하게 됐고, 조국인 대만을 떳떳이 '국가' 로 부를 수 없다는 점에 깊은 갈등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국 독립파를 낙선시키려는 것이 북풍의 의도였다면, 그 목적은 철저하게 실패했다고 이 논문은 강조했다.

오히려 대만인들의 자긍심을 높여준 결과를 낳았다는 판단에서다.

진세근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