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죽어도 죽지 않는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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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미국 공화당 대통령후보 경선을 수십년만의 열전으로 이끈 '매케인 선풍' 은 며칠 전 부시 지사의 슈퍼화요일 대승으로 숨을 죽였다.

부시의 승리가 예상되는 남부 큰 주들의 다음 주 예선을 앞두고 매케인은 마침내 후보지명전 철수를 선언했다.

그러면 매케인은 한때의 영광을 뒤로 하고 빈 손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비록 후보지명을 따내지는 못했어도 그의 선전(善戰)은 적잖은 승리를 그와 그의 지지자들에게 가져다주었다.

두 당 온건파와 무소속 유권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모은 매케인의 정강(政綱)들을 승리자들도 무시할 수 없다. 당내 예선이라면 몰라도 양당이 대결하는 본선에서는 바로 이 범주 유권자들이 승리의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단적인 예가 선거자금법 개정문제다. 매케인이 가장 역점을 둔 정강인 데다 슈퍼화요일을 앞두고 현행법으로 허용되는 더티플레이에 그가 결정적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부시 지지자들이 지난 주말 공식적 선거운동 울타리 밖에서 수백만달러를 들여 매케인 비방광고를 풀자 뜻밖에 민주당의 고어 부통령이 신랄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그 자신의 최대 약점이 4년 전의 불법모금 혐의이므로 어찌보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격 같기도 하다.

고어는 매케인의 입장을 두둔함으로써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패배를 앞둔 매케인 지지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

부시로서도 매케인 지지자들이 탐나기는 하지만, 극렬한 대결로부터 포용쪽으로 방향을 돌리기가 쉽지 않다. 매케인을 이기기 위해 부시는 극우파라 할 수 있는 복음교회 정파와 손을 잡았다.

이 정파 지도자 팻 로버슨은 슈퍼화요일 '투표결과가 나온 '직후 부시가 매케인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하는 데 반대한다고 공언했다. 매케인과 양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패배를 인정하고 부시에게 축하를 보내면서도 매케인은 그를 지지한다는 뜻을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선거전에서는 물러나지만 개혁운동을 포기하는 것은 아님을 강조하며 지지자들에게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더욱 매진할 것을 호소했다.

이 의연한 패자의 뜻을 어떻게 수용하느냐가 이제 승자들에게 숙제로 주어졌다. 후보는 사라져도 정강은 살아있는 것이다.

후보와 유권자들 사이의 피드백을 통해 정책이 다듬어져가는 모습을 보며 민주주의의 본질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담겨 있음을 절감한다. 하나의 밀알이 죽어 다음해 수확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이런 풍토다. 승자가 모든 것을 싹쓸이하는 비생산적 제로섬 게임에서는 흑색선전이고 지역감정이고 가릴 것이 아무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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