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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길 산책] 정겨운 나물타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6면

바람이 아직도 가슴팍을 파고드는 품이 기생첩년 뺨친다.

요샌 한겨울에도 무.배추 등 푸성귀는 물론 수박.딸기 등 과일에 이르기까지 먹을 거리가 넉넉하지만 그래도 이때쯤이면 깔깔해진 입맛에 숟가락을 절로 떨구게 마련이다.

예나 지금이나 식탁을 책임져야 하는 아낙들이 가장 괴로운 것도 바로 이때다. 해서 남정네들이야 빈둥대든 말든 식구들의 헛입맛 다시는 소리를 뒤에 두고 딸을 잡아끌어 찾아나서는 게 바로 봄나물이다.

눈이 무릎만큼이나 빠지는 한 겨울에도 양지바른 산자락 비탈밭이나 논두렁을 들여다보면 여린 싹을 빼꼼히 내민 채 앙증스런 자태로 대춘(待春)을 하고 있는 게 이들이다.

종류도 쑥.냉이.달래.씀바귀.돌나물.질경이.소리쟁이.원추리 등에다 보리싹이나 녹비(綠肥)로 쓰는 자운영, 심지어 민들레.엉겅퀴순까지 가지가지다. 독초가 아닌 이상 웬만한 것은 모두 찬거리로 삼는 우리네 식문화의 너그러움이다.

의정부에서 송산행 버스를 타고 종점에 가면 용암리(남양주시 별내면) 가는 길이 나온다. 수락산을 등지고 광릉산을 향해 삼태기 안 같은 길이 시오리도 넉넉한데 응달말.도감말.거묵골.언덕말 등 동네가 그림 같고, 어디를 둘러봐도 나물이 지천이다.

나물이야 사시장철 나는 것이지만 봄나물이 그중 특별한 것은 단순히 새 것이란 신선함에 앞서 겨울의 혹독함을 이겨낸 질긴 생명력을 한껏 따먹는 즐거움 때문이리라. 채소의 원조가 나물이고 보면 개명한 나라치고 아직 이를 즐기는 백성이 우리뿐인 까닭도 이와 다르지 않다.

허해진 기(氣)를 자연의 생명력으로 다스린다? 이 얼마나 절묘한 식약동원(食藥同源)의 슬기인가.

이루 다 들 수는 없지만 봄나물 가운데 생명력의 오묘함을 맛보려거든 원자탄의 폐허에서 맨 먼저 싹을 틔웠다는 쑥으로 끓인 애탕(艾湯)이요, 오죽 쓰면 이름이 그럴까마는 입맛을 돋우기는 소태같은 씀바귀 무침이 제일이다.

또 하초가 부실하다싶으면 오훈채(五菜 : 불가에서 음욕이 일게한다는 이유로 피하는 다섯가지 나물)중의 하나인 아릿한 맛의 달래요, 어제 들이켠 술에 몸을 맡긴 주객들에겐 이뇨와 간에 좋다는 냉이국이고, 아들을 낳기를 바라는 임신부나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샐러리맨은 득남초.망우초(忘憂草)로 불리는 원추리국을 드실 일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까만 시골에선 계집애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에 나물타령이란 게 있었다.

한푼 두푼 돈나물, 매끈매끈 기름나물, 어영꾸부렁 활나물, 동동말아 고비나물, 줄까말까 달래나물, 칭칭감아 감돌레, 집어뜯어 꽃다지, 쑥쑥말아 나생이, 사흘굶어 말랭이, 안주나 보게 도라지, 시집살이 씀바귀, 입맞추어 쪽나물로 이어지는데 모두 36가지 나물이 등장한다.

나물 캐기가 여인네의 몫인 만큼 딸들에게 대물림을 위해 이같은 노래가 지어졌을 정도로 나물은 우리네 살림에 단단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봄을 캐는 여심이 정겨운 계절이다.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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