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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밸리, 접대는 고급 끼니는 대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지난 10일 오전 6시45분 서울 역삼동에 위치한 이코퍼레이션 교육사업부 사무실. 남들은 새벽잠에 취해 있을 시간에 허겁지겁 사무실에 들어서는 이 회사 직원 한수연(27.여)씨의 손에는 강남역 포장마차에서 산 1천원짜리 김밥 한줄이 들려 있다.

한씨는 들어서기 무섭게 김밥을 먹어치우고 7시에 시작하는 강의실로 서둘러 발을 옮긴다.

'부(富)가 보장된 희망의 거리' 로 주목받고 있는 테헤란밸리 직원들의 아침식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일에 있어서 낮과 밤이 따로 없는 이들에게는 먹거리도 시간과 공간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그러다보니 테헤란밸리의 식당가에는 다른 사무실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음식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테헤란밸리에는 아침부터 짭짤한 재미를 보는 식당과 사람이 많다.

한씨처럼 아침식사를 거른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은 지하철역 주변의 간이음식점이나 빌딩 지하 스낵코너. 주로 김밥과 샌드위치로 이들의 허기진 배를 달래준다.

특히 이곳의 요쿠르트.우유배달 아주머니들은 손수 만든 샌드위치를 취급해 두둑한 '곁다리 수입' 을 올리고 있다.

매일 샌드위치를 50개씩 준비해 나온다는 김윤숙(52.여)아주머니는 "시간에 쫓겨 자주 아침식사를 거르는 사람들은 아예 대놓고 먹기도 한다" 고 말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투자자나 거래처 사람들을 대접해야 하는 벤처인들은 특급호텔이나 고급음식점에서 식사를 한다. 그래서 새로 문을 여는 고급음식점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특히 삼성역 섬유센터빌딩 뒤편이나 LG강남타워.르네상스호텔 주변에는 고급일식집이 즐비한 가운데 새롭게 단장하고 개업준비를 하는 음식점도 쉽게 눈에 띈다.

그렇지만 회의가 지연되거나 갑작스런 일이 생기면 꼼짝없이 사무실에서 점심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허름한 배달전문식당을 이용해 배를 채운다.

이들 식당은 1인분에 3천~4천원을 받는 가정식백반 을 취급하지만 벤처인들의 까다로운 입맛에 맞추느라 질이나 양은 나무랄데가 없다. 배달식당은 주로 역삼동 특허청 뒤편에 밀집돼 있다.

인터넷 소프트메신저를 서비스하는 디지토의 김근태사장은 "배달전문식당 10여군데의 전화번호를 확보하고 수시로 이용하고 있는데 특히 야근할 때 요긴하다" 고 전했다.

그렇지만 테헤란로의 대형빌딩 중에는 입구에 '음식반입금지' 라고 써붙이고 '철가방' 의 출입을 통제하는 곳이 많다. 덕분에 인근 도시락체인점이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다.

한솥도시락 테헤란점의 경우 점심시간이면 20여명이 줄을 설 정도로 북새통을 이룬다.

벤처기업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전화로 주문한 뒤 가져가기 위해 직접 오는 것이다. 줄을 서 있던 한 여직원은 "수위아저씨들이 철가방은 통제를 하지만 우리 직원들이 직접 봉투에 담아가는 것은 눈감아 준다" 고 말했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2~4시경. 다른 오피스가 식당에서는 저녁준비가 한창일 시간에 이곳 빌딩 주변이나 지하 식당에서는 각 테이블에 혼자 앉아서 허겁지겁 식사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역삼동 태평식당의 여주인은 "하루에 보통 10여명이 점심시간을 놓쳐 뒤늦게 혼자 식사를 한다" 며 "서둘러 먹다가 체하지나 않을지 걱정" 이라고 말했다.

저녁 역시 두 갈래 길로 나뉜다.

직원회식은 고기집인 반면 거래처 접대는 고급 일식집이 일반코스. 2차도 직원 회식은 강남역 부근의 생맥주집으로 이어지는 반면 접대자리는 르네상스 뒷편에 있는 룸싸롱으로 옮려진다.

테헤란밸리의 시작과 끝에 있는 강남역과 삼성역 주변에는 24시간 영업을 하는 해장국집이 많다.

이곳에서는 자정을 넘긴 시간임에도 밤늦게 일을 마친 동료끼리 출출한 배를 달래는 사람, 이미 얼큰하게 취해 속풀이하는 사람들이 뒤엉켜 있다.

편의점에는 야식을 사러 나온 벤처직원들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을 편의점 종업원들은 '밤손님' 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편의점의 야간 매출을 죽이고 살리는 중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테헤란밸리의 먹거리는 밤낮없이 움직이는 벤처인들을 닮아 24시간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다.

유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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