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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혁칼럼] '좋은 대통령' '좋은 총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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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새해 들어 청와대엔 무척 행사가 많았던 것 같다. 1백, 2백명씩을 초청하는 대형 오찬행사가 줄을 이었다.

지난 2월의 몇가지 사례만 봐도 불교관계자 1백50여명, 유교관계자 1백90여명과의 오찬이 있었고, 원불교.천도교.대종교.성덕도.태극도 등의 지도자와의 오찬도 있었다. 환경미화원 등 불우계층인사.보건산업관계자.기능올림픽선수단 등도 초청받았다.

이희호(李姬鎬)여사도 청소년적십자관계자 94명, 여성농업인 2백68명과 다과회.오찬을 가졌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지난 2월28일엔 이례적으로 대구 2.28의거 기념식에도 참석했다. 이 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런 행사에서 金대통령은 으레 중.저소득층 지원을 약속하고 초청인사 분야별로 얼마의 예산으로 어떤 사업을 벌일 것이라는 정부계획을 설명하곤 했다.

내각도 새해 들어 몹시 바빠진 것 같다. 몇조(兆)원을 들여 서민층을 지원하고 청년실업자와 서민주택 구입을 돕는 다는 등의 선심성 정책을 분주하게 발표하고 있다.

국제원유가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는데도 세금을 깎아 국내 기름값을 묶겠다고 하고, 중고차세금을 깎아준다는 기특한 정책도 내놓았다. 이동전화료를 내린다는 반가운 뉴스도 나왔는데 웃기는 것은 민간회사의 요금인하를 민주당선거대책위원회의 회의결과 형태로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국정홍보에도 몹시 바쁘다. 농림부가 홍보자료 때문에 선관위의 경고를 받은 일도 있지만 고속도로 톨게이트.버스터미널.기찻간에도 홍보자료가 대량으로 나돌았다.

당사자들은 이런 모든 일을 '통상적인 국정수행' 이라거나 '총선과는 무관한 민생대책'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선거에 대한 이례적인 청와대의 열성이나 신년사에서까지 신당을 홍보한 대통령의 발언 등을 보아 사람들은 "아하! 때가 왔구나" 하는 느낌을 절로 갖게 된다.

선거철이면 대통령도 고민이 많을 것 같다. 대통령으로서는 초당적 엄정중립의 자세로 공명선거를 관리해야 하지만 집권당 총재로서는 야당을 누르고 여당의 승리를 이끌어내야 할 입장이다.

한 몸에 두가지 모순.상극되는 임무가 주어져 있는 것이다. 또 두가지 임무를 구별하는 명확한 기준도 없다. 대통령으로서의 통상적 국정수행인가 하면 보기에 따라 교묘한 여당편들기일 수도 있다.

오직 스스로의 도덕성과 양식으로 대통령은 두가지 임무를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게 잘 분별해 수행해야 할 책임을 지는 것이고, 국민은 대통령이라면 당연히 그런 분별은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돌이켜 보면 역대 대통령들은 그런 분별에 대부분 실패했고, 그로 말미암아 실패한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은 자유당총재로서,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공화당총재로서, 전두환(全斗煥)대통령은 민정당총재로서… 각기 엄정중립은 커녕 대통령권력을 편파적으로 남용하다가 비극적 결말을 초래했다.

여당의 선거승리나 정권 재창출 같은 일은 엄격히 말해 여당총재가 할 일이지 여기에 대통령의 권력이나 영향력이 개입해선 안되는데도 역대 대통령들은 '대통령' 으로서 여당을 편들고 권력으로 여당승리에 몰두하다가 실패한 것이다.

金대통령이 이번 총선에서 안정의석을 얻지 못하면 정책추진이 어려워지고 조기에 레임덕 현상이 올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안정의석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여당총재로서 꼭 할 일이다.

그러나 여당총재가 할 일에 '대통령직' 이 개입하는 일은 결코 없도록 자기가 맡은 두가지 임무를 엄격히 분별해 일정한 선을 긋고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국정을 선거에 이용하는 인상을 주거나 선거용이라고 의심받는 선심정책.대량홍보 등의 현상은 대통령으로서는 엄격히 피하고 막아야 할 일이다.

사실 선심정책이나 치적홍보 같은 것은 자유당이래의 구식(舊式)으로 지금 무슨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만일 여당승리를 위해 '여당총재' 아닌 '대통령' 으로서 개입한다는 인상을 주면 그 자체가 여당의 큰 선거악재(惡材)가 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좋은 대통령' 과 '좋은 총재' 는 양립하기 어려운 면이 많다. '좋은 총재' 가 되려다 자칫 '나쁜 대통령' 이 될 가능성은 아직도 크다. 많은 국민이 金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은 '좋은 총재' 보다 '좋은 대통령' 일 것이다.

송진혁<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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