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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EU 상임의장·외교대표 선출에 비판 쏟아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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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유럽연합(EU)을 대표할 대통령 격인 상임의장과 외무장관 격인 외교대표로 무명의 남녀가 나란히 뽑힌 것을 두고 비판적인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EU 헌법을 기초한 지스카르 데스탱 전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의 야망이 꺾였다. 유럽인들은 더 많은 것을 기대했다”고 말했다. EU 집행위원장을 지낸 로마노 프로디 전 이탈리아 총리는 “충격적이다”, 미셸 로카르 전 프랑스 총리는 “농담이겠지”란 혹평을 내놓았다. 언론들 반응도 비슷하다. 점잖기로 소문난 영국 국영 BBC가 “신임 상임의장이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비꼴 정도다.

비판론이 거센 것은 EU의 통합이라는 거대한 이상이 회원국의 자국 이해 챙기기와 정치 지도자들의 밀실협상으로 일그러졌다는 평가 때문이다. 7년 전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은 유럽의 정치적 통합을 위한 헌법 초안을 만들 당시 헌법기초위원을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에 비유했다. 미국 연방과 같은 정치적 통합을 이뤄내고, 미국 대통령과 같은 유럽의 정치 리더십을 만들어내겠다는 야심이었다.

당시만 해도 모든 EU 지도자는 이런 구상에 동의해 헌법기초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유럽의 정치적 통합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길게 볼 때 유럽의 정치적 통합은 제1, 2차 세계대전의 희생을 치른 유럽인들의 꿈이었다. 더 길게 보자면 200년 전 나폴레옹의 유럽 통일, 칸트의 영구 평화론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뿌리 깊은 염원이다.

1989년 동유럽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통합의 꿈이 가시권으로 들어왔다. 유럽인들은 꿈에 부풀기 시작했다. 유럽이 미국·소련이라는 강대국에 의해 갈라졌던 냉전시대가 끝났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99년 유럽은 단일통화(유로)를 출범시킴으로써 경제적 통합을 완성했다.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진정한 통합, 즉 정치적 통합을 향한 기대가 한껏 부풀었다. 정치적 통합은 세계대전 이후 상실해온 국제적 영향력을 높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유럽이 평화를 영구화하고 냉전시대 이전의 영향력을 되찾을 수 있는 일거양득의 묘책인 셈이다.

그러나 결과는 밀실협상과 무력한 정치적 리더십의 탄생이다. 캐서린 애슈턴이 외교대표로 선출된 과정이 전형적인 예다. 애슈턴은 결정 당일인 19일 아침까지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했다. 애슈턴은 회의 참석차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기차를 타러 가려던 중 영국 총리실로부터 “잠깐 기다려봐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이전까지 아무도 애슈턴을 외교대표 후보로 거론하지 않았으며, 당일 오후까지도 확정이 안 됐다.

애슈턴이 급부상한 것은 영국이 당초 대통령 격인 상임의장에 토니 블레어 전 총리를 밀다가 좌절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주인을 자처하는 프랑스·독일의 정상은 블레어와 같은 거물의 등장을 원치 않았다. 프랑스·독일이 보기에 ‘유럽의 변방’ ‘유럽과 미국의 중간쯤’인 영국이 유럽대륙을 대표한다는 것도 맞지 않다. 더욱이 블레어와 같은 강한 추진력을 지닌 인물이 나설 경우 각국 정상들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이 뻔하다.

결정적으로 유럽 의회 좌파(사회당·노동당 등) 정치 지도자들이 영국의 집권 노동당에 “블레어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고든 브라운 총리는 상임의장을 포기하는 대신 외교대표 자리를 요구했다. 브라운은 “외교대표 자리를 주지 않을 경우 상임의장 자리를 포기하지 않겠다. 회의장에서 블레어에 대한 표결을 요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유럽정상회의는 사전 협상을 통해 만장일치로 추대하는 전통을 유지해왔기에 표결 요구는 매우 강한 반발이다. 프랑스·독일이 동의했다. 동시에 영국도 프랑스·독일이 내세운 상임의장안에 동의했다. 영국이 제안한 후보 가운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같은 여성인 애슈턴을 찍었다고 한다.

유럽 각국의 자리 다툼은 이제 시작이다. 상임의장과 외교대표 인선에 타협하는 과정에서 자기 몫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 등 유럽의 주인들이 지분을 나눌 차례다.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행위원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 이미 시작됐다. 가장 중요한 EU 내부 금융·통상규제 업무를 담당할 위원 자리는 프랑스 몫이고, 다음으로 중요한 유럽중앙은행 총재 자리는 독일이 가져갈 것이란 얘기가 파다하다.

미국 뉴욕 타임스는 “유럽이 진정한 정치 통합으로 나아갈 준비가 안 돼 있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경제통합체 수준에 머물 것”이라고 전망했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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