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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喪때 받은 명함 한 장, 사업 성공 실마리 되다

중앙일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997년 8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한 출판기념회. 새정치국민회의(현 민주당) 이석현 의원은 이 행사에 참석한 한 중국인에게 자신의 해외용 명함을 내밀었다. 당시 이 의원은 영어·중국어·일본어 등 7개 외국어로 표기된 해외용 명함을 사용했는데 중국어로는 ‘한국(남조선) 국회의원 이석현’이라고 썼다. 이때만 해도 중국에서는 한국을 북한(북조선)과 구별해 남조선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데 착안한 것이다.

여기서 ‘남조선’이란 표현이 문제가 됐다. 때는 대통령선거를 4개월여 앞둔 상황. 신한국당(현 한나라당)이 이 명함을 꼬투리로 잡았다. 김대중(DJ) 후보에게 색깔론 공격을 펼친 것이다. 그는 DJ를 보호하기 위해 결국 탈당까지 해야 했다. 우연이었는지, 2000년 총선에서는 600여 표 차이로 낙선하기도 했다. 이 의원은 “외국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친절을 베푼 것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사상이 이상한 사람’으로 몰렸다”며 “명함 한 장 때문에 엄청난 일이 벌어진 셈”이라고 회고했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이 의원은 당시에 쓰던 명함을 모두 폐기했다. 이른바 ‘과잉 친절’이 빚은 해프닝이 대선 정국을 소용돌이치게 했던 사건이다. 명함은 이렇게 엄청난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명함은 간혹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기도 한다. 자동으로 명함을 정리해 주는 문자 인식 솔루션인 ‘하이네임’ ‘서프’ 등을 개발해 연 16억원대 매출을 올리고 있는 한국인식기술의 송은숙 대표가 좋은 예다. 세 딸을 둔 주부이자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송 대표는 2002년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으로 사업 일선에 뛰어들었다. 이때 송 대표가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게 바로 작은 명함이었다.

“문상객 중에 ‘혹시 나중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며 명함을 주신 남편 지인이 계셨다. 대전·충남 경영자총협회 박희원 회장이었다. 경황 중에 받아 정리가 안 됐다. 나중에 찾으려 해도 찾아지지 않아 온 집안을 뒤졌다. 어렵게 명함을 찾아내 나중에 박 회장을 찾아갔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 명함 관리의 필요성을 크게 느꼈다. 그렇게 어렵게 찾은 명함 한 장이 지금의 송은숙, 한국인식기술을 있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함을 위조하거나 도용한 사건은 셀 수 없을 정도다. 대형 사기 사건에 단골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 작은 종이 위에 적힌 ‘권위’에 기대 권한을 챙기거나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뿌리도 깊다. 1952년 내무부 치안국에 경찰관 복직 원서가 접수됐다. 경기도 경찰국에 근무하는 모 경관을 복직시켜 달라는 탄원서였다. ‘경기도 어느 지서로 배치를 희망한다’는 요지의 글을 쓴 명함에 커다란 도장까지 찍혀 있었다. 명함의 주인은 장택상 당시 국무총리. 조사 결과 이 명함과 도장은 해당 경관에 의해 위조된 것으로 드러났다. 요즘도 “창업투자회사 회장 명함을 돌리면서 재력가 행세를 했다” “청와대 임명장과 명함을 만들어 사기를 쳤다”는 등의 뉴스가 나오는 것을 보면 ‘명함의 힘’은 여전한 듯하다.

지나치게 미사여구로 포장된 명함은 일단 주의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일부 영업직의 ‘요란한 명함’은 과장됐을 수 있다는 것이다. 10년 넘게 보험업계에 종사해온 문모 설계사는 “VIP 담당이나 수석컨설턴트 같은 화려한 직위를 내세우는 것은 그나마 약과”라며 “보험 설계사들이 내미는 명함 속에 들어간 AFPK·CFP·MDRT 등의 자격증이나 ‘연도대상 수상’ 같은 문구는 가끔 가짜도 있다”고 귀띔했다.

반면 공직자나 국가기관의 부조리를 파헤치던 ‘마패’ 같은 명함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특명 암행감사관을 지냈던 박양호 전 감사원 사무차장의 명함 겸 신분증이 그렇다. 박 전 차장은 당시 알루미늄으로 만든 일반 명함 1.5배 크기의 ‘암행 특명장’을 지니고 전국을 누볐다. 알루미늄 판 위에 ‘암행’이라는 표기와 함께 ‘본 감사관에게 모든 국가기관은 협조하라 대통령 박정희’라는 문구가 또렷하게 적혀 있다. 박 전 차장은 “공직자의 비리와 무능을 적발할 뿐만 아니라 밑바닥 민심까지 파악하는 데 암행어사 명함이 힘이 됐다”고 회고했다.

이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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