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 문화코드 2000] 1. 신고식 계절이 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하루 24시간 세계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지구촌 시대. 그러나 한반도에 살고있는 '한국인' 을 우리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에게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생활문화란 거울을 들고 오늘, 이땅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참모습을 살펴보는 자리를 편다.

한국 사회의 독특한 단면을 보여주는 문화코드를 간추려 문화사적 배경과 의미를 풀이해보는 시리즈를 주1회 게재한다.

내일이면 경칩(驚蟄). 무르익는 봄 기운에 겨울잠 자던 개구리며 짐승들이 화들짝 놀라 깨어나는 날이다. 그래, 3월은, 봄은 모든 것이 깨어나는 계절이다. 긴 겨울 잠, 죽음의 허물을 벗고, 불살라버리고 되살아나는 철이다. 제 각각 달라진 품으로 새 생명을 신고하는 계절이다.

병아리는 병아리 대로 개나리는 개나리 대로, 초·중·고·대학에 들어온 자는 학생 답게, 학교를 벗어나 직장 사회로 들어온 사람들은 직장인 답게 모두 새내기로 신고한다.

초등학교 골목이 시끌벅적하다. 집안의 재롱둥이·응석받이들이 이제 학생이 돼 하나 둘 하나 둘 구령에 맞춰 걸어간다. 너와 나의 거리를 유지하며 발을 맞춘다. 이렇게 집안에서 나와 우리들은 초·중·고교를 차례로 입학·졸업하고 대학에도 들어가고 사회에도 나오게 된다.

그 때마다 우리는 통과의례를 치른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면서 이전의 삶을 죽이는 고통이 따르는 의식이다. 통과의례의 한 전형이 항간의 신고식. 신고식은 새로운 집단에 편입될 때 그 집단의 극한을 압축적으로 겪게 하면서 공동체 의식과 함께 인내심을 심어준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군대 신고식을 잊지 못한다. 모진 신병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되면 호된 신고식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위 고참에게 이유도 없이 정신 못차릴 정도로 얼차려를 받고 신고 요령을 익혀 내무반 최고참에게 자신이 누구라고 신고해야 한다.

대학도 이맘 때면 신고식으로 눈코뜰 새 없다. 새내기들은 학과·동아리·출신 지역과 고교별로 보통 네댓번 신고식을 치른다. 신고식의 절정은 '금주법' 에서 벗어난 새내기들의 음주. 대학마다 또 동아리마다 전통적인 음주법이 따로 있다. 냉면 그릇 같은 큰 사발에 막걸리나 소주를 가득 따라 단숨에 마시게 하는 것이 사발주다. 세숫대야에 소주를 가득 부어 돌아가면서 주량껏 마시다 마지막 학생이 나머지를 다 마시는 세숫대야주도 있다. 잔을 다섯개 포개놓고 위로부터 폭포처럼 쏟아부어 한번에 5잔을 다 마시는 5배주 등 '신고주' 도 다양하다.

그렇게 새내기들은 혼절할 만큼 술을 마시고 소년에서 청년으로 다시 태어나 그 학교의, 동아리의 전통으로 편입된다.

통과의례에는 이런 '가상 죽음 의식' 이 담겨있다. 너무 호되게 신고식을 치르다 정말 죽음에 이르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신고식의 내용이 변하고 있다.

대학의 경우 요즘 새내기들의 자유분방한 개성과 실속 차리기가 신고식을 선택사항으로 만들고 있다. 고려대 학생회는 "올해 신입생환영회 때 전통의 사발주 의식은 하겠지만 원하는 사람만 참가하게 하겠다" 고 말한다.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이전만해도 일단 취직을 하면 전체 신고식과 함께 부별·입사연도별 신고식을 거쳐야했다. 폭탄주·화주·인생주 등이 난무하며 신입사원을 정신 못차리게 했다.

술이 학창시절을 말끔히 털고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하는 매개체 구실을 했다.

그러나 이제 신입사원에게는 노트북 PC와 e-메일 ID가 주어진다. 그것을 통해 선배들은 짤막한 환영인사와 함께 구체적 업무지시를 곧바로 내린다. 신입사원들은 어느 선배가 자신의 업무에 정통했는지 PC로 탐색하며 일을 배운다. 위에서 아래를 살피는 '일방 탐색' 이 아니라 위·아래가 서로 탐색하고 평가한다.

"신고식은 이제 '의식' 이 아니라 경쟁자 모색입니다. 자신이 들어간 집단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을 받아들이는 기간이며 어떤 선배가 자신보다 뛰어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나 탐색하는 기간이지요." 인터넷 통신회사 키텔 박관우 대표는 요즘 신참들은 들어오자마자 선배와 경쟁하겠다는 의식이 팽배하다고 전한다.

신입사원들이 조직에 참여하면서 '유물' 처럼 일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특정분야에 정통하고 조직에서 담당할 역할이 있어 '합격' 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집단의 일체감보다 개인의 개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이제 혹독한 '신고식 문화' 는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봄은 혹독한 추위가 부른 것 아닌가. 오래전부터 우리 입에는 '봄이 오긴 왔는데 봄같지 않다(春來不似春)' 는 실망스런 말이 자주 오르내린다.

너 나 모두 잃은 것 얻은 것 없이 뜨뜻미지근하게 살아냈기 때문이다. 맺고 끊음 없이 개인이나 사회는 나만이 아니라 만물을 생장시키는 진정한 봄을 부를 수 없다. 신고식의 좋은 의미는 확실한 맺고 끊음에 있다.

이경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