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YS의 침묵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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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YS 정치를 특성짓는 요소는 고집과 집념이다.

80년대 초반 5공 시절 YS가 정치풍토쇄신법에 묶여 정치활동이 금지돼 있던 시절이었다. 그가 시청 입구 서소문통의 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실에 들어가려다 경찰의 제지를 당했다. 경찰과 YS 추종자들이 승강이를 벌였다.

그러자 그는 차에서 내려 길 한복판에 그대로 서서 농성을 시작했다. 구경꾼들이 몰리고 차가 막혔다. 그는 당원들을 주위에 둘러서게 한 뒤 그 자리에 선 채 소변을 깡통으로 받아내며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경찰이 손을 들고 물러섰다. 그의 고집은 막무가내여서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그것이 그를 불굴의 야당투사로 만들었다.

그에게 정치란 공기와 같다. 87년 대선때 그는 패배했다. 역시 패배자였던 김종필(金鍾泌)후보가 노태우(盧泰愚) 당선자에게 축하꽃다발을 보내 깨끗한 승복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을 때, 그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선거가 부정이었고 이제부터 정권퇴진운동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거센 비난과 함께 정계은퇴 요구가 잇따랐다. 그는 여론에 밀려 설악산으로 피신해 2선후퇴의 움직임을 보이는 척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YS는 그에게 불리했던 소선거구제를 받는 조건으로 그의 정적이었던 김대중(金大中)씨와 제휴함으로써 정계로 하산한다.

그에겐 은퇴란 있을 수 없으며 잠시도 정계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정치를 말라, 정치에서 초연하라는 것은 숨쉬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그는 퇴임 후에도 여전히 정치적 행위를 한다. 남이 말못할 때 DJ정권에 대해 '독재' '거짓말쟁이' 라는 말을 내뱉어야 직성이 풀리고, 또 3金정치 연장이니, 후3金정치니 어쩌고 비난이 일어도 민주산악회를 발판으로 자신의 정치세력을 재건하려드는 것이다.

지금 그는 사실상 정치를 재개한 상태다. 많은 정치인들이 그의 정치적 후광을 빌려 상도동을 찾는다. 신당을 만들기 위해, 당을 수습하기 위해, 때로는 정치적 재기를 위해, 때로는 눈도장을 찍어 두려고 사람들이 꼬인다.

그런 그들을 앞에 두고 그는 '말' 을 삼간다. 침묵이 훨씬 다양한 의미를 전파하며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침묵으로 빚어지는 정치적 파장을 즐기며 그 효과를 계산한다. 자칫 잘못 입을 열었다간 자신의 정치적 속셈이 망가질까 동향을 살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자파(自派)를 거느리고 싶고 다음 대선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은 그가 총선을 앞에 둔 채 끝끝내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는 많은 정치적 실책을 저질렀다. 그는 87년 대선에서 야당단일화에 실패했고, 88년 총선에선 3당으로 전락했다. 그는 매수정치로 YS 장학생을 만들어 정치를 부패시켰다. 그러나 그는 또 번번이 시련을 딛고 재기했다. 단식투쟁으로 군부의 압력을 견뎠고, 3당합당으로 적진에 들어가 대통령직을 따내는 모험에 성공했다.

그의 마지막 정치적 실패는 국제통화기금(IMF)외환위기를 불러온 통치의 무능과 후보난립을 조장해 결과적으로 DJ를 당선시킨 97대선 때의 침묵정치라고들 한다. 이제 그의 정치적 생명은 부산.경남 일대의 지역감정에 기대 겨우 연명되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그는 그를 지지하는 끈질긴 지역감정의 근저를 잘 헤아려야 한다. 김대중.김영삼(金泳三) 양金에 대한 지지의 밑바탕은 광주항쟁.부마(釜馬)항쟁처럼 바로 군부정권의 압제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저항정신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가 권위주의적 권력에 저항하는 길을 걸었을 때, 국민들의 아픔을 같이 했을 때 사랑을 받았으며 그 길을 벗어났을 때 지지를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점잖은 훈수나 하면서 자선활동이나 환경보호운동을 하기엔 그는 너무도 야전적(野戰的)인 정치인이다. 그러나 평생을 그랬듯이 그는 국민과 함께 걸으려 했던 야당적인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가 언제 침묵을 깨고 또 '중대발표' 를 할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국민과 함께 민주화투쟁의 큰길(大道)을 걷는 불굴의 투사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을 것이다.

김영배<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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