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5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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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53. 약소국의 비애

나는 미 국무부 핵(核)감시국장인 앨런 세섬 박사를 마중하기 위해 도착 시간에 맞춰 유성 고속버스터미널로 나갔다. 잠시후 그가 터미널에 나타났다.

그는 비록 흑인이지만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대에서 핵물리학 교수를 지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1983년 12월말이었으므로 날씨가 매우 쌀쌀했다. 내가 그에게 "대덕(大德)공학센터로 안내하겠다" 고 말했더니 그는 "대합실에서 얘기하는 게 좋겠다" 며 사양했다.

나는 "무슨 용건이길래 예고도 없이 이렇게 나를 찾아왔느냐" 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한국과 캐나다가 공동으로 추진중인 '연계(탠덤.tandem)핵연료주기' 기술 개발사업에 미국도 참여하게 해 달라" 고 요구했다.

이어 그는 "미 국무부는 연구비가 충분하니 틀림없이 이 사업에 큰 도움이 될 것" 이라고 말했다. 연계 핵연료주기란 경수로(輕水爐)에서 사용한 핵연료 가운데 독성이 강한 물질만 제거한 후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분리하지 않은채 중수로(重水爐)핵연료로 재사용하는 것?말한다.

나는 그제서야 그가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 하지만 난처했다. 그 문제는 나 혼자 결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는 예전부터 우리나라 원자력 기술 개발을 견제한 장본인이었으므로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를 논리적으로 설득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차분하게 내 의견을 얘기했다.

"한국과 캐나다가 공동으로 수행하고 있는 연계 핵연료주기 기술 개발사업은 양국간 협약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내 맘대로 이 자리에서 가부(可否)를 결정할 수 있겠느냐.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우리 정부와 캐나다 정부가 상의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떻게든 나에게서 확답을 듣고 싶어했다. 그는 거듭 "미국이 참여해서 나쁠 게 뭐가 있느냐" 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나 역시 분명하게 내 입장을 밝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와 캐나다가 정식 협정을 체결해 1년 전부터 추진하고 있는 사업에 미국이 중간에 끼어 들겠다는 것은 국제적 관행을 무시한 처사가 아니냐" 고 반박했다.

그는 이 말이 신경에 거슬리는 듯 나에게 뼈있는 말을 했다. "韓박사, 당신은 곧 에너지연구소장이 될텐데 미국과 긴밀히 협조하는 게 현명할 거요. 그렇지 않으면 소장이 돼서도 소장 노릇 하기가 쉽지 않을 걸. "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나 자신도 내가 에너지연구원소장이 될지 뭐가 될지 전혀 모르고 있는데 당신은 워싱턴에 있으면서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느냐" 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미 국무부가 그 정도의 정보도 없는 줄 아느냐" 며 "아무튼 미국에 협조하는 게 좋다" 고 나에게 충고했다.

결국 이날 '터미널 협상' 은 결렬됐다. 그는 끝내 대덕공학센터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실제로 나는 세섬 박사가 다녀간지 4개월만인 84년 4월 그의 말대로 에너지연구소장이 됐다. 미국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섬 박사는 나를 만나 얘기가 잘 풀리지 않자 즉시 캐나다측에 압력을 가했다. 아예 연계 핵연료주기 기술 개발사업을 중지시키기 위해서였다.

미국측은 우리가 이 사업에 성공하면 재처리 기술은 쉽사리 익힐 것으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사실 연계 핵연료주기는 '사용후 핵연료' 에서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분리하는 재처리의 바로 전단계에 해당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기술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려 했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이 사업은 착수 1년만인 84년 초에 중도 하차하고 말았다.약소국이 겪여야 하는 비애였다.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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