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5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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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캐나다 화이트셸연구소의 핵연료주기 개발담당 부소장인 윌리엄 행콕스 박사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내가 '연계(탠덤.tandem)핵연료주기' 기술을 공동 개발하자고 제안하자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연계 핵연료주기란 경수로(輕水爐)에서 사용한 핵연료 가운데 독성이 강한 물질만 제거한 후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분리하지 않은 채 중수로(重水爐) 핵연료로 재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나에게 "한국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며 "한국과 우리는 협력해야 한다" 고 힘주어 말했다.

전혀 뜻밖이었다. 이렇게까지 그가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어 그는 "한국에 줄 수 있는 기술은 모두 주겠다" 며 "캐나다와 미국은 매우 가깝지만 캐나다도 약소국임에는 틀림없다" 고 말했다.

말 속에 뼈가 있었다. 캐나다 역시 핵문제에 있어서는 미국의 철저한 견제를 받고 있음을 암시하는 얘기였다.

그는 나와 헤어질 때 다시 한번 "한국을 적극 돕겠다" 고 말했다. 캐나다 방문은 일단 성공이었다.

나는 귀국 즉시 대덕(大德)공학센터 핵연료개발부장인 임창생(林昌生.60.전 한국원자력연구소장)박사에게 "빠른 시간 내에 캐나다와 공동연구를 추진하라" 고 지시했다.

林박사는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1회 졸업생으로 미 매사추세츠 공과대(MIT)에서 핵공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실력가였다.

학위를 받은 후 곧바로 원자력의 원조라고 불리우는 미 웨스팅하우스社에서 핵연료 설계팀장으로 7년간 경수로 핵연료를 설계한 실무 경험도 있었다.

그는 그 좋은 환경을 마다하고 경수로 핵연료를 국산화하겠다는 꿈을 안고 1976년 3월 귀국해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적임자라고 판단, 이 사업의 타당성 검토를 포함해 캐나다측과의 협상 책임을 맡겼다.

협상은 원만하게 진행됐다. 마침내 83년 1월 우리와 캐나다 원자력공사(AECL)는 연계 핵연료주기 공동연구 협정을 체결했다.

나는 이 사업 책임자로 林박사를, 부책임자에는 핵주기공정연구실장인 박현수(朴賢洙.54.한국원자력연구소 핵연료주기기술개발단장)박사를 임명했다.

朴박사는 고려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하웰연구소를 거쳐 프랑스 에콜 드 스트라스부룩 국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소장 연구원이었다. 연구 경험이 풍부했고 의욕 또한 대단해 한번 과제를 맡기면 반드시 해내고야 말았다.

83년 6월 朴박사는 전관식(全寬植.56.한국원자력연구소 처분기술개발팀장).유재형(柳在亨.53.한국원자력연구소 핵화공연구팀장)두 연구원과 함께 캐나다로 떠났다.

6개월간 AECL 산하 화이트셸연구소에서 선진기술을 익히는 한편 캐나다 연구진과 연계 핵연료주기에 대한 공동연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행콕스 부소장은 이들을 아낌없이 도와주었다. 朴박사가 나에게 전해준 바에 따르면 그는 우리 연구진에게 핵심 기술을 전수해 주고 연구소의 중요한 자료들을 마음껏 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나에게 한 약속을 철저히 지킨 셈이다.

우리 연구진은 모처럼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철저히 기술을 익히고 서둘러 자료들을 복사했다.

마침 그때 주한 미대사관에서 뜻밖의 연락이 왔다. 미 국무부 핵 감시국장인 앨런 세섬 박사가 나를 만나기 위해 고속버스를 타고 유성으로 출발했다는 것이었다. 이때가 83년 12월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통상 미국측 관리가 우리 연구소에 올 때는 미대사관 차를 이용하거나 우리가 차를 서울이나 김포공항까지 내보내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그는 이런 관례를 완전히 무시했다. 나는 그가 왜 나를 만나러 내려오는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글=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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