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진단] 돈 우량은행으로 몰린다…금융기관 양극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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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돈이 우량은행을 찾아 움직이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대우채 환매가 실시된 이달초부터 지난 18일까지 투신권 공사채형 수익증권에서 빠져나간 돈은 약 12조원.같은 기간 정기예금 등 은행의 저축성예금은 10조6천억원이나 늘어나 환매자금중 상당부분이 은행권으로 이동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돈이 모든 은행으로 몰려간 것은 아니다.

국민.주택 등 부실부담이 적고 이익을 많이 낸 은행들의 경우 밀려드는 자금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인 반면 일부 은행들은 예금 증가폭이 미미하거나 오히려 줄어든 경우도 있어 울상을 짓고 있다.

1998년 부실은행 퇴출사태 이후 서서히 진행돼온 금융기관간의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 현상이 최근 대우채 환매자금의 은행권 유입을 계기로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내년부터 은행이 망하면 원리금을 합쳐 2천만원까지만 보장되도록 예금보호제도가 대폭 축소됨에 따라 고객들이 돈 맡길 은행을 고를 때 금리차보다 안전성을 최고의 잣대로 여기기 시작한 때문이다.

이같이 고객의 선택에 따라 우량은행과 부실은행이 자연스럽게 나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은행권에선 이를 계기로 정부가 진작부터 운을 띄웠던 '시장(市場)에 의한 제2차 구조조정' 이 앞당겨지지 않을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영기 한국개발연구원(KDI)금융팀장은 "정부 주도의 1차 은행 구조조정이 지난해로 얼추 마무리된 만큼 올해부터는 시장에서의 경쟁우위에 따라 생존을 위한 합병과 퇴출이 일어날 것" 이라고 진단했다.

◇ 두드러지는 자금이동 양극화〓올들어 수신 증가가 가장 뚜렷한 은행은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은행총수신(은행계정+신탁계정)을 기준으로 국민은행이 지난 19일까지 무려 3조4천9백억원, 주택은행이 2조7천5백억원의 예금이 들어왔다.

다음으로 수신 증가폭이 큰 은행은 한빛.외환.한미.신한.하나은행의 순. 반면 공적자금 투입후 아직까지 진로가 뚜렷하지 않은 서울은행은 수신이 1백73억원 느는데 그쳤고 제일.평화은행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은행 예금의 대종을 이루는 정기예금만 놓고 보면 주택은행이 2조5천4백억원으로 최대 증가폭을 기록했다.

이밖에 국민(1조9천7백억원).외환(1조7천4백억원).한빛(1조2천7백억원).조흥(1조1천1백억원).한미(1조8백억원)은행 등이 올들어 1조원 이상의 정기예금이 몰렸다.

주택은행의 경우 본점 개인영업부 한곳에만 올들어 지난 19일까지 1천5백억원 규모의 정기예금이 새로 들어와 화제다.

"이는 지난해 두달간 평균 증가분이 2백억원 안팎에 불과했던데 비하면 7.5배나 많은 수준" 이라고 주택은행 관계자는 전했다.

이처럼 시중 자금이 우량은행의 정기예금으로 몰리면서 그간 금융시장 불안에 따라 지속된 자금시장의 단기 부동화 현상도 점차 해소되는 추세다.

국민은행 마케팅부 정하경 팀장은 "지난해 말엔 정기예금 중 만기 1년 이상의 비율이 27.8%에 불과했던 반면 올해는 2월 중순 현재 33%로 늘었다" 면서 "이에 따라 정기예금 평균 만기도 5.9개월에서 6.2개월로 소폭 증가했다" 고 말했다.

◇ 몰리는 돈 반갑지 않은 우량은행〓우량은행들은 급증하는 예금을 마땅히 굴릴 곳이 없어 고민이다.

우선 대출 수요가 별로 없다는 것부터 문제다. 또 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높게 유지하자면 들어온 돈(자산)을 안전한 국공채나 콜론(금융기관간 자금거래)으로 운용해야 하는데, 이 경우 금리가 낮아 역마진을 보기 십상이다.

이에 따라 실제로 일부 우량은행들은 예금금리를 타행보다 낮게 유지하는 한편 지점에서도 적극적인 예금유치 활동을 하지 않는 전략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김옥평 한미은행 리테일사업본부 이사는 "예전에는 무조건 예금을 확보하는 게 최선이었지만 요즘은 BIS비율 유지가 관건" 이라며 "자본 확충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돈이 많이 들어와 자산규모만 늘어나는 것은 결코 달갑지 않다" 고 말했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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