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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코펜하겐으로 가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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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그 치밀하다는 일본이 왜 이렇게 됐을까. ‘체면’과 ‘의욕’을 너무 앞세웠기 때문이다. 일본은 1997년 12월 교토에서 유엔 기후협약총회를 열었다. 169개 나라 대표들은 2012년까지 온실가스를 90년보다 평균 5% 이상 줄이기로 합의했다. 이때 개최국인 일본은 다소 무리했다. 국제 평균보다 1% 많은 6%를 줄이기로 했다.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총리는 “개최국으로서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산업계는 “미국·한국 같은 경쟁국에 밀린다”며 반대했지만 들은 체도 안 했다.

결과는? 10년간 노력했지만 낙제점이다. 6%를 줄이기는커녕 2006년 말 현재 되레 6.4%가 늘었다. 주범은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던 산업계가 아니라 침묵했던 가정이었다. 산업계는 목표보다 온실가스를 더 줄였지만 가정은 되레 37%를 더 뿜어냈다. 예컨대 업계는 에너지 효율이 더 높은 에어컨을 만들어냈지만 에어컨 한 대 쓰던 가정은 방마다 한 대씩으로 에어컨 수를 늘린 것이다. 일본은 앞으로 못 줄인 온실가스는 탄소배출권을 사서 메우기로 했다. 이를 위해 매년 2조 엔(약 25조원)가량의 환경세를 거둘 계획이다.

‘남의 일’은 여기까지다. 이번엔 우리 차례다. 다음 달 7일 코펜하겐이 데뷔 무대다. 여기서 유엔 기후변화협약 정상회의가 열린다. 2013년 이후 온실가스 감축을 논의한다. ‘녹색 전도사’를 자처하는 MB는 의욕이 넘친다. ‘자발적으로 더 많이 줄이겠다’며 ‘얼리 무버(early mover)’를 자임했다. 내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개최국의 체면도 있다. 97년의 일본처럼 ‘다소 무리할’ 조건이 무르익은 셈이다.

MB는 어제 코펜하겐에 들고갈 안을 확정했다. 2020년까지 2005년 온실가스 배출량보다 4% 줄이는 것이다. 녹색성장위원회가 제시한 안 중 가장 강한 것을 택했다. 예상대로였다. “국가 경쟁력을 해친다”는 산업계의 목소리는 묻혔다. 정부 관계자는 “산업 쪽 감축은 전체 목표량의 9% 정도로 최소화했다”며 “설령 다소 무리하더라도 먼저 가야 기회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굳이 GE 이멀트 회장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녹색은 돈’이다. 이미 같은 값이면 저이산화탄소 상품만 팔리는 시대다. 높아가는 선진국의 녹색 규제와 장벽을 뚫으려면 우리가 먼저 녹색혁명을 이뤄내야 한다는 지적도 옳다.

그런데 부족한 게 있다. 국민적 합의와 실천이다. 좀 무리한 국가 목표일수록 성공하려면 국민이 도와야 한다. 그러려면 정보 공개와 공론화가 필수다. 수십·수백 번씩 국민에게 알리고 호소해야 한다. 알아야 납득하고, 납득해야 실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제껏 반대로 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쳤다. 녹색위 관계자는 “70여 차례 간담·토론·공청회를 열었다”며 “충분히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업계는 “간담회에서 말 한마디 할 기회를 안 줬다”고 말한다. 정보도 공개는커녕 감추기에 급급했다. 이번 감축안으로 얼마나 부담이 생기느냐는 질문엔 “가구당 21만원”이란 답변이 전부다. 한 민간연구소가 추산한 144만원에 비하면 7분의 1 수준이지만 왜 다른지, 어떻게 나온 숫자인지 설명이 없다. 부문별 분담액을 물어보면 “어느 나라나 비밀”이라며 함구한다.

코펜하겐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좁다. 경제뿐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길이다. 웬만한 각오론 안착하기 어렵다. 특히 국민이 지금처럼 대형차만 찾고, 냉방은 추울 만큼, 난방은 반소매 속옷 입을 정도라야 적당하다고 여기게 놔두는 한 결과는 뻔하다. 검소·절약으로 이름난 일본도 그래서 실패했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