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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세종시, 기업에 지나친 부담을 주면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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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기업들이 공장을 지을 때는 수백 가지를 따진다. 적당한 입지를 물색하면 소리 없이 땅을 사 모은다. 자칫 소문이 퍼져 땅값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공장 밑의 지하수맥까지 따지는 게 기업의 생리다. 삼성전자는 기흥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 지하수맥이 서해 쪽으로 흐르는 것까지 확인했다. 반면 하이닉스(옛 현대전자)는 이천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 이를 소홀히 넘겼다가 탈이 났다. 지하수맥이 한강으로 흘러들어 수질보전대책지구로 묶이는 바람에 생고생을 한 것이다. 이러니 기업들의 입지 선정은 더욱 세심해질 수밖에 없다.

세종시 수정론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기업 유치를 위한 정부의 행보가 본격화되고 있다. 정운찬 총리는 세종시 민관합동위원회 첫 회의에서 “세종시를 돈과 기업이 모이는 경제 허브, 과학과 기술이 어우러져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과학 메카로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어제 저녁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단과 만찬을 함께했다. 세종시를 ‘기업 중심 도시’로 바꾸기 위한 구체적인 의사 타진에 들어간 것이다.

야당은 즉각 “세종시에서 행정을 떼내려고 기업의 등을 떠밀고 있다”며 비난하고 있다. 정부의 속도전에 일부 기업들도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다. “세종시의 책임을 기업에 떠넘기려는 게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알려진 바와 달리 물밑에서 큰 관심을 보이는 대기업들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수도권에서 가까운, 그것도 흔하지 않은 대형 알짜배기 부지를 정부가 조성원가인 평(3.3㎡)당 227만원보다 훨씬 싼 값에 주겠다면 누가 마다하겠느냐는 것이다. 충청권의 웬만한 공장부지도 평당 100만원에 육박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세종시의 기업 유치는 철저히 경제논리, 기업논리에 따라야 할 것이다. 헐값 매각은 피해야 특혜 논란은 물론 다른 지방자치단체들의 ‘역차별’ 시비를 차단할 수 있다. 세종시 수정을 위해 기업들에 지나친 부담을 지우는 것도 금물이다. 지금은 정부가 이전 기업을 점찍어 놓고 마치 ‘토끼몰이’하는 식의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기업들이 ‘무언의 압박’에 못 이겨 억지로 끌려가는 듯한 모습은 정부나 기업, 해당 주민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세종시 기능을 바꾸려면 기업들의 참여는 필수적이다. 다만 기업들과 접촉하기 전에 구체적인 개발계획부터 세우고, 확실한 인센티브를 제시하는 게 올바른 수순이라고 본다. 지금처럼 정부는 뭔가를 꾸미는 듯하고, 어느 기업이 세종시에 투자한다는 보도가 쏟아지고, 해당 기업들은 “검토조차 안 했다”며 시치미를 뗀다면 혼선만 키울 뿐이다. 기업들이 기업논리에 따라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아야 한다. 기업 생태계에 적합한 인프라가 구성된다면 누구라도 앞다투어 세종시로 옮겨갈 것이다. 정부는 규칙 제정자(rule maker)에 머물러야지, 자꾸 선수(player)처럼 그라운드로 뛰어들면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