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현장] 세종시는 기업들의 ‘민원 도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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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에 가서 삽질하는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내쫓으면 어떻게 합니까. 대기업으로서 안 갈 수도 갈 수도 없고…. 정말 스트레스입니다.”

요즘 세종시 건설을 놓고 말 많은 5대 그룹 중 한 곳의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런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다. 5대 그룹들은 최근 물밑에서 정부 측과 잇따라 막후 협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귀찮은 척 관심 없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이것저것 따지면서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무언의 압박’에 못 이겨 억지로 끌려가는 듯한 인상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LG그룹 측은 “검토한 일 없다”고 밝혔지만 세종시에 이미 파주첨단소재단지와 같은 그린재생에너지단지를 세우는 방안을 정부 측과 논의했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 측도 “말할 수 없다”고는 했지만 “그린카 연구센터 등은 검토 중”이라며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삼성그룹도 계열사인 삼성전기가 세종시에 1400억원 규모의 투자를 하는 방안을 협의 중인 사실이 드러났다.

재계의 한 인사는 “알려진 바와 달리 많은 대기업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세종시 입주를 제안하는 실정인데 이를 공식 부인한다면 ‘반중매 반연애’라고 표현하면 적절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평소에는 보기도 힘든 대규모의 땅을, 그것도 값싸게 주겠다는데 마다할 대한민국 기업이 어디 있겠느냐는 반문이다. 5대 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세종시 2200만 평(7290만㎡) 중 구릉지 등을 빼고 쓸 만한 곳은 1100만 평”이라며 이미 입지 경쟁까지 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5대 그룹은 현재 세종시 조성원가인 평(3.3㎡)당 227만원보다 파격적으로 싼값에 주겠다는 정부의 제안을 받고 있다.

사실 5대 그룹 중 가장 적극적인 곳은 롯데그룹이다. 맥주공장을 짓는 것을 협의 중이다. 맥주공장은 국세청의 허가사항으로 세종시에 짓는다면 이런 난제가 한꺼번에 풀릴 수 있다는 셈법이다. 세종시가 ‘기업들 민원도시’가 될까 우려스럽다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한국은 규제가 많고 땅값이 비싸 기업하기 힘든 나라다. 그런데 현재 거론되고 있는 세종시 입지조건이야말로 대기업으로선 이게 웬 떡이냐 싶을 정도다. 땅값이나 세금을 깎아주는 등 이런저런 특혜를 많이 주고 있다는 얘기다. 세종시는 충청도 지역 주민과 야당의 반발이 거센 데다, 법을 고쳐야 하는 등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기업하기 좋은 나라’와 ‘자발적인 기업 투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김시래 산업경제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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