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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금강산개발 日기자가 막후중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고바야시 게이지(小林慶二.65.사진) 규슈코쿠사이(九州國際)대 교수가 현대그룹의 금강산 개발사업 등과 관련해 남북한의 막후 밀사를 맡았다고 공개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아사히(朝日)신문 서울 특파원을 지낸 고바야시는 10일 발매된 월간지 중앙공론 3월호에 기고한 수기에서 남북의 중개역을 맡은 과정을 소개했다.

그는 "남.북, 북.일 간에는 새 파이프가 생기고 있는 만큼 내 역할은 끝났다" 고 수기를 쓰게 된 동기를 밝혔다.

고바야시는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정.재계 인사와 두터운 교분을 맺어왔으며, 북한도 여러 차례 들른 대표적 민간인 대북 파이프다.

다음은 수기 요약.

◇ 현대 금강산 개발사업〓현대측의 요청은 1997년 가을에 있었다. 김영삼 전대통령과 경남중 동기인 박정두(朴正斗)현대증권 고문을 통해서였다. 며칠 숙고하다 맡기로 했다.

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의 금강산 개발에 대한 열의와 그의 결단력, 서민들의 북한 방문이 가능하게 될 것이란 점 때문이었다.

현대측은 교섭 전권을 위임하는 위임장과 개발계획을 보내왔다. 서명은 이익치(李益治)당시 현대증권사장 명의였다.

이들 서류와 '금강산 개발은 현대가 적임' 이라는 편지를 김용순(金容淳)아태평화위원회 위원장에게 인편으로 보냈다. 회신은 6개월 동안 오지 않았다.

그래서 북한과 무역을 하는 요시다 다케시(吉田猛)신일본산업 사장을 통해 북측에 다시 의사를 전달했고, 북측으로부터 "교섭을 하자" 는 답을 받았다. 교섭은 현대-필자-요시다-평양 라인을 통했다.

수십차례의 교섭 끝에 98년 2월 3일 싱가포르에서 양측이 만나 협의키로 했다. 그러나 현대 내부의 문제로 2월 15일 베이징(北京)에서 첫 협의가 열렸다.

협의에는 정몽헌(鄭夢憲)회장과 송호경(宋浩敬)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필자가 참가했다. 북측은 당시 금강산 개발 허가조건으로 쌀 10만t 지원과 한우 수송용 트럭을 요구해 협의가 난항을 겪었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강인덕(康仁德)전 통일부장관의 도움도 컸다. 교섭 성공은 현대의 끈질긴 접근과 새 정부의 햇볕정책 지원 때문이다.

◇ 남.북, 북.일 중개〓86년 서울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해 외무성 간부, 조총련 친구 등과 함께 모임을 만들었다.

구성원은 나중에 스즈키 가쓰야(鈴木勝也)아시아국 심의관(현 브라질대사), 요시다 사장으로 바뀌었다. 필자의 제안으로 평양을 드나든 요시다를 통해 북.일 정부간 접촉이 파리에서 이뤄졌다.

이 접촉은 90년 가네마루 신(金丸信)자민당 부총재 방북의 길을 열게 했다. 92년말 한국에서 대통령선거를 취재하던 중 조총련 친구로부터 "김용순 비서가 평양으로 와주기를 바라고 있다" 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93년 1월 베이징을 통해 평양에 들어갔다. 귀국후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에게 金의 의견을 전하는 편지를 쓰면서 "북한이 취임 연설을 주목하고 있다.

직접적인 비판은 가능한 한 피해달라" 고 했다. 어쨌든 연설에는 이같은 내용이 반영됐다.

95년 북한에서 팩스가 왔다. 식량지원 문제로 한국과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시 필자는 김영삼 대통령과 바로 연결되는 팩스 번호를 알고 있었다. 그 팩스를 이용해 북한이 접촉을 희망한다고 설명했다.

한국 정부는 곧바로 이석채(李錫采)당시 재경원 차관을 베이징에 보냈고, 쌀 15만t의 지원이 결정됐다.

정리〓오영환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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