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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신흥국의 물가 디커플링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40호 30면

미국의 억만장자 짐 로저스가 마치 하느님의 비밀을 누설하듯이 말했다. “내년 금값이 1온스당 2000달러를 넘어선다.” 순간 대표적인 ‘닥터 둠’인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경제학) 교수가 반박했다. 로저스의 말이 “터무니없는 난센스”라고 일갈했다. 흥미로운 두 사람의 시각 차이는 ‘세계 경제 최대 위협이 무엇인가’에서 비롯됐다. 루비니는 디플레이션을, 로저스는 인플레이션을 우려하고 있다.

루비니는 금값이 온스당 2000달러까지 치솟을 인플레이션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각 미국 인플레이션협회(NIA)는 루비니가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경제학을 공부한 루비니가 그 차이를 모를 리 없다. 또 미국·영국·유럽·일본의 중앙은행들이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고 막대한 자금을 풀어 놓은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바보나 다름없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디플레이션 위협이 여전히 높다고 주장하는 루비니를 반박하기도 쉽지 않다. 고백하면 나는 로저스의 말을 믿고 금에 베팅하기보다 루비니의 주장이 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또 이머징 마켓에서 버블이 일고 있다는 루비니의 진단에도 동의한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가미카제 거품이 붕괴한 이후 1990년대에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일본 중앙은행과 행정부는 경기를 되살리기 위해 금리를 0% 수준까지 낮췄을 뿐 아니라 재정을 풀었다. 하지만 물가는 계속 떨어져 디플레이션 단계에 진입했다. 경제가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으면 돈을 풀어도 물가 상승 압력은 크지 않다. 미국도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는 듯하다.

현재 미국과 90년대 일본 사이에 다른 점이 있기는 하다. 당시 일본 부실채권은 주로 기업들에 쌓여 있었다. 반면 현재 미국 부실채권은 일반 가계에 누적돼 있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는 주택시장을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모기지(장기 부동산 담보대출) 시장에 돈을 풀고 있다. 가계 부채를 더욱 키우고 있는 셈이다. 경제가 침체인 상황에서 빚을 내 집을 사도록 하는 것이 누구에게 이익이 될지 나는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정책이 가계 부실을 키우고 있다는 점만은 알고 있다.

보험회사 트래블러스와 합병을 단행해 씨티그룹을 탄생시킨 존 리드가 90년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다고 인정하고 사과했다. 이는 아주 이례적인 일로 남을 듯하다. 요즘 월가 금융인들은 시장이 좀 안정되자 ‘우리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되물으며 자신들을 강변하고 있다. 반성이 없으면 비슷한 일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크다. 위험한 머니게임이 다시 살아나 위기가 되풀이될 수 있다. 결국 돌발 상황이 발생해 루비니의 예측대로 실물경제가 다시 곤두박질하고 디플레이션 위협이 커지는 상황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 등 선진국의 물가 상승 압력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신흥국들도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금리를 0~0.25% 수준에서 유지하는 바람에 중국과 인도네시아·태국의 물가 압력이 커질 수 있다. 실제로 일부 자산시장이 과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인플레이션 디커플링(탈동조화)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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