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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럼] 그 놈의 영어때문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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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국제회의나 세미나에 자주 참석하는 외국인들은 한국인과 일본인들에게서 묘한 공통점을 발견한다고 한다.

이른바 '3S' 다.

좀체 말을 않는 것(Silent)이 첫째다.

잠자코 있다가 꾸벅꾸벅 조는(Sleep)일이 둘째다.

졸다가 눈길이 마주치면 민망한 듯 웃음을 지어(Smile)보인다.

상대방 얘기를 알아듣기가 힘들고, 하고 싶은 말은 많아도 표현이 제대로 안돼 강요당하는 침묵이다.

일본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일본통(通)에드윈 라이샤워는 일본의 각급 지도자들 가운데 "만나서 간단한 인사를 넘어 5분정도 영어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던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고 회고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일본은 당당했다.

국제회의장에서 일본의 각료들은 으레 일본어연설에 통역을 붙였고, '아쉬우면 그쪽에서 일본어를 배우라' 는 식으로 호기까지 부렸다.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잘 나갈 때의 얘기였다.

그러던 일본이 '장기적으로 영어를 제2의 공용어로 하는 국민적 논의의 필요성' 을 공식 제기하고 나섰다.

일본경제는 10년째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정보산업화와 글로벌 금융기법에서 미국보다 최소한 20~30년 뒤져있기 때문이다.

수출로 막대한 무역흑자를 내고, 국민들은 다투어 저축해 제로금리의 최대 저축국이 되면 뭘하나.

이 돈을 글로벌시장에서 굴려 기업가치와 국부(國富)를 계속 키워나가고, 지식정보화를 촉진시켜 신산업을 창출하고 기존 산업을 서둘러 고도화시켜야 한다.

기껏 땅짚고 헤엄치기로 미국 재무부증권이나 사고, 빌딩이나 골프장 등 해외부동산에 투자했다 헐값에 모두 되팔고 물러서지 않았던가.

지구촌 구석구석에 일본상사 없는 곳이 없지만 일본식 경영을 해외에 옮겨놓은 '국제화' 이지 글로벌 경영이나 세계화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이 모두가 '영어장벽' 때문이라는 일본인들의 자기 고백이 더없이 충격적이다.

그래서 영어의 정복을 통한 '글로벌 리터러시' (global literacy)의 확립을 새 일본의 비전으로 내걸었다.

'글로벌 문맹(文盲)' , 즉 '컴맹' 과 '넷맹' '영맹' (英盲)으로부터의 탈피다.

이것이 어찌 일본만의 일이랴.

영어는 이제 과학.기술언어이자 인터넷언어다.

국제비즈니스의 80%, 컴퓨터저장 데이터는 90%가 영어로 된 정보들이다.

좋든 싫든 글로벌시대의 필수적인 생존수단이다.

인터넷세대들은 기저귀를 졸업하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영어의 알파벳 키보드를 접한다.

언어 국수주의로까지 불리는 프랑스마저 국민들에게 영어를 학습시키려 드는 마당에 국적과 민족문화의 잣대로 영어의 조기교육을 저울질함은 너무도 시대착오다.

영어가 '세계어' 화하면서 '세계의 미국화' 에의 위험은 물론 무시못한다.

달러와 영어에다 정보산업의 소프트웨어 표준들마저 미국 것 일색이니 그럴 만도하다.

그러나 글로벌 표준과 글로벌문화가 확산될수록 미국화는 도리어 희석되고, 영어 또한 '싱가포르 영어' (Singlish) '일본 영어' (Janglish)식으로 가지를 쳐 풍요해지게 마련이다.

힌두어의 잠옷 'pajamas' 가, 유치원을 뜻하는 독일어 'kindergarten' 이 영어화한 것을 보라. 달러를 자국 화폐로 채택한 나라의 경제가 미국화하거나 미국에 예속된 경우가 있는가.

우리의 영어교육만큼 고비용.저효율도 없다.

대학까지 10년 이상을 배워도 한평생 '영어스트레스' 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어설픈 의사소통이 국가단위의 교섭을 그르치고 꼬이게 하는 경우가 한둘이던가.

언어학습 차원을 넘어 사고방식과 자기표현 행동양식을 글로벌화시키는 인격교육으로 격상시켜야 한다.

혀부터 꼬부라지는 조기유학보다 민간 외국어학교에 위탁하는 일본의 구상을 우리도 검토해볼 만하다.

영어수업이 미국화수업이 된다면 개인적.국가적 비극이다.

남의 흉내내기가 아니라 우리 것과 우리 생각을 남에게 제대로 이해시키고 글로벌 시민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우리자신을 자리매김하는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

변상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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