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3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31) 잘되면 부하功

나는 국방과학연구소(ADD)에 파견대장으로 나와 있는 주한 미 군사고문단의 지안콜라 중령과 매클로이 상사, 그리고 풍산금속 공장장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이들은 집요하게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벌컨포의 문제점을 물고 늘어졌다.

예컨대 미국제 벌컨포의 경우 내부 정밀도가 2/1000~3/1000㎜인데 비해 국산 벌컨포는 이보다 한참 뒤떨어진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국산 벌컨포에 기술상의 결함이 있어 발사 사고가 일어난다는 얘기였다.

이들은 '미국의 탄약 제조회사인 오린社가 제공한 기술과 장비.재료 등을 갖고 풍산금속에서 만든 국산 벌컨탄에 문제가 있다' 는 내 주장을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에 대해 나는 '만약 국산 벌컨포에 결함이 있다면 국산 벌컨포에 미국제 벌컨탄을 넣고 발사할 때도 문제가 발생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결국 국산 벌컨탄에 문제가 있기 때문' 이라고 반박했다.

나는 수없이 반복된 성능시험 결과에서 나타난 구체적인 데이터를 제시해 가며 국산과 미국제 벌컨탄의 차이점을 자세히 설명했다.

특히 풍산금속 시설을 이용해 측정한 국산과 미국제 벌컨탄의 추진력 상태를 비교.분석한 도표를 보여줬다. 그러자 이들은 이때부터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게다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맹선재(孟琁在.68.한양대 명예교수)재료시험실장이 국산과 미국제 벌컨탄의 뇌관(雷管)재질을 비교해서 찍은 현미경 사진을 본 후에는 더 이상 반박을 못했다.

마침내 이들은 '국산 벌컨탄의 뇌관과 추진제(推進劑)재료가 불량품' 이라는 내 주장에 굴복하고 말았다.

사실 국산 벌컨포에도 전혀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6개월간 홍판기(洪判基.66.전 대영전자공업 사장)ADD 총포개발부장과 황해웅(黃海雄.60.전 ADD 소장.현 한국기계연구원 원장)선임연구원이 피나는 노력끝에 문제점을 모두 해결해 놓았다. 그러니 그 시점에서 남은 과제란 탄약 개선 밖에 없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8시였다. 무려 4시간 동안이나 설전(舌戰)을 벌인 셈이다. 창밖은 완전히 어둠에 휩싸였다.

열띤 공방을 벌인 뒤라 갑자기 시장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나머지 세 사람은 저녁 식사를 할 생각도 않고 '멍' 하니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이제는 식사나 하러 가자" 고 제안했다.

그제서야 이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식사 자리에서 지안콜라 중령과 매클로이 상사가 내게 보여준 태도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일단 내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자 조금 전까지 거세게 항의하던 자세는 온데간데 없이 아주 깍듯해졌다. 그러더니 "조속히 시정조치를 취하겠다" 며 정중히 사과했다. 식사를 마치자 밤이 너무 깊었다. 우리 세 사람은 풍산금속 근처 여관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그런데 통 잠이 오지 않았다.

40억원의 손해배상금이 걸린 문제에서 저들이 패했으니 '혹시 밤 사이에 나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 서울로 올라와 곧바로 이 사실을 김성진(金聖鎭.69.전 과기처장관)부소장에게 보고했다. 이때가 1977년 12월 말이었다.

金부소장은 주한 미 군사고문단측과 대화가 잘 됐다는 내 얘기를 듣고 몹시 기뻐했다. 그러더니 "자네가 이 모든 일을 책임지고 했으니 심문택(沈汶澤.98년 작고)소장을 모시고 노재현(盧載鉉.74)국방장관에게 직접 보고하게" 하는 것이었다. 공(功)을 나에게 돌리겠다는 뜻이었다. 원래 벌컨포 문제 해결은 金부소장이 국방부로부터 지시받은 사항이었다.

그가 최종 보고를 하는 것이 당연했다. 나도 완강히 거절했다. 이 문제를 놓고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글=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