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섹스와 실험결혼의 전주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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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총각 시절 결혼 풍습은 매우 완고해 혼전 교섭은 물론 다른 이성과의 추문에도 민감한 부정의 딱지가 늘 붙어 다녔다.

곽대희의 성칼럼

동네에서 피아노를 치는 여학생 집을 배회한 전력을 가진 K라는 친구는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녔다는 죄목(?) 하나로 다른 배필을 찾는 데 지장이 아주 많았다.

난봉꾼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가 파다하게 항간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 남녀의 성 모럴은, 차라리 결혼 전 성경험을 통해 남녀가 공히 섹스 능력을 저울질해 보는 것이 실패할 확률을 줄이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하는 편에 근접해 있다. 어디 그뿐인가.

필자의 동료 중에는 재혼에서도 실험적 섹스 제의에 동의하는 재혼 지망생이 몇 사람 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필자의 클리닉을 자주 이용하는 50대의 C씨는 3년 전에 상처(喪妻)한 사람이다. 그는 재혼 목적으로 30~40명의 여성과 선을 보고 상대방의 이모저모를 뜯어보기 위해 이른바 데이트를 자주 했다.

그때마다 서로 궁합이 잘 맞아야 한다는 구실로 러브호텔 동행을 요구했더니 절반가량이 그 제의에 순순히 따라주더라고 털어놓았다. 마치 유럽사회에 한때 유행했던 실험결혼의 축소판 같은 느낌이 드는 데이트 장면이었다. 지금도 북구 여러 나라에서는 처녀와 총각이 서로 월세방을 얻어놓고 자유롭게 드나들며 삶을 즐기다가 배우자로 삼아도 괜찮겠다고 느꼈을 때 결혼하는 관습이 있다.

구미 제국의 결혼 관습이 대개 이런 방식인데, 이 실험결혼 방식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라고 알려져 있다. 프리섹스의 종주국 덴마크를 비롯해 스웨덴, 노르웨이 등은 물론 지중해와 가까운 북아프리카 원주민이나 필리핀 등의 폴리네시안 사이에서 이런 결혼 형태가 존재하거나 혹은 전에 존재했던 제도라고 학자들은 이야기한다.

인간 생활의 실리적 지혜가 낳은 합리주의적 결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물론 그쪽 사람들의 사정이다. 19세기 영국의 요크셔 지방에서는 ‘당신이 만약 수태하지 않으면 결혼은 무효가 된다’라는 선서를 미리 해두는 것이 결혼의 전통 방식이었다고 한다.

반면 가톨릭의 결혼에서는 신부의 입회 아래 일단의 혼인 예식을 올리게 되면 설령 불임 또는 심각한 임포턴스라고 해도 이혼은 절대로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그런 실험결혼은 불행 방지 기능을 어느 정도 수행했다고 본다. 지금도 미국의 결혼에서는 그런 조항이 달린 결혼계약서 교환이 변호사 입회 아래 이뤄진다고 한다.

16세기 휴머니스트라는 칭송을 받는 토머스 모어는 그의 저서 『유토피아』에서 결혼 전에 충분히 상대방을 체험하고 적정한 수준에 맞을 경우 혼인해야 실패가 없다고 했다. 실제로 당시 영국에서는 신부가 권위 있는 종교인과 의사가 배석한 자리에서 옷을 벗고 나체 상태에서 신체검사를 받았음을 이 책에 소개해 놓았다.

또한 존 오브리의 『짧은 생명』이란 책에는 신랑의 부친이 신부가 될 처녀의 집에 가서 완전히 나체가 된 처녀의 몸을 구석구석 살피고 나서 결혼을 승낙하지 않으면 결혼이 성립하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토머스 모어는 실험 결혼의 유용성에 대해 이렇게 언급해 놓았다. “사람은 작은 오두막집을 구매할 때도 자질구레한 부분까지 살피면서 일생의 행불행이 걸린 아내를 선택하는 데 손바닥 한 개로 가릴 수 있는 얼굴만 보고 고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코노미스트 10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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