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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세상보기] 나의 금강산 유람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변명부터 해야겠다.

'금강산 안간다' 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남북 교류협력 사업의 하나로 금강산 관광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틀에 꽉 짜여진 관광 일정, 북녘 사람들과의 접촉을 엄하게 제한하고 있는 여러 규정들이 그 당시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북녘 땅을 그저 한가하게 둘러봐서는 안된다는, 나 자신에 대한 단단한 충고이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쓴 글을 배반하고 지난 연말 금강산에 갔다 왔다.

호화 유람선 객실에서 며칠 동안 잘 자고 잘 먹었으니 함께 간 아내한테 모처럼 점수도 좀 땄다.

물론 단순히 관광을 목적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모 방송국의 새천년 특집방송 취재를 핑계로 삼았다.

어쨌든 금강산 안간다고 떠벌리며 공언한 자가 슬쩍 약속을 파기한 죄 크다.

그러나 걱정 없다.

그 죄값을 집요하게 따지는 가까운 벗들에게 돌아와 남북합작담배 '하나' 를 한개비씩 물려 입막음해놓았으니까.

금강산 가는 길은 선상에서, 버스에서 북한에서의 행동 요령을 귀가 따갑도록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신변안전이 걱정된다면 참고 들어야 한다.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곳에서는 카메라를 꺼내지 않으면 되고, 손가락질하지 말라는 곳에서는 주먹을 꼭 쥐고 있으면 된다.

함부로 북쪽 안내원들과 대화하지 말라고 했으니 입에다 천 근 자물통을 채워 두면 그만이다.

그 걸 견디지 못하겠거든 목돈 들여 금강산 갈 생각 아예 하지 말고 설악산 쪽으로나 여행 코스를 잡는 게 백 번 낫다.

나는 애초에 그렇게 마음먹었다.

금강산 유람 길에는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똥이다.

그랬더니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겨울 장전항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에도, 천하명산 금강산 입구에서도 내 마음 속의 감흥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금강산에 한 발 두 발 가까이 발을 옮겨도 금강산은 도통 보이지 않았다.

만물상도 귀면암도 천선대도 망양대도 금강문도 옥류동 계곡도 비봉폭포도 구룡폭포도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날씨는 쾌청했고, 점심 도시락은 맛있었다.

그런데 금강산에 갔는데 금강산이 보이지 않다니! 육당이나 춘원 같은 문장가들은 저 20세기 초에 금강산에 갔다 와서 고요히 기행문을 남긴 바 있다.

나는 그이들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명색이 21세기를 사는 시인으로서 말이다.

장전항의 북측 출입국 관리 요원 한 사람이 내 관광증에 적힌 직업을 보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말했다.

"시인은 처음 본다?"

시인이란 남녘에서는 어디에다가 내놓기도 낯부끄러운 명함 아니던가.

비록 몇 초 동안이었지만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그 선한 눈빛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내가 대면한 최초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이었다.

그나마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을 보지 못했다면 요즘 아이들 표현대로 이번 여행은 '꽝' 이 될 뻔했다.

아내와 나는 거금 30달러씩 특석 입장료를 냈다.

무엇보다 사람을 제대로 보고 싶었던 것이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기술은 놀랍고도 감동적이었다.

무대와 객석 사이의 간격은 관객들의 박수소리로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공연 시작부터 끝까지 박수는 잦아들지 않았다.

그것은 무대와 객석이 하나임을, 배우도 관객도 갈라설 수 없는 똑같은 사람임을 확인하는 신호였다.

막이 내리자 객석은 기어이 출렁이는 울음바다가 돼 버렸다.

손을 흔들며 무대 뒤로 사라지는 북쪽 배우들도 눈물을 글썽거렸다.

금강산에 가서 금강산은 보지 못했지만, 나는 벗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통일은 어려운 게 아니다.

통일은 눈물로 하는 것이다.

감상적으로, 낭만적으로 하는 것이다.

감상적 통일론은 위험하다고 손을 내두르는 벗들아, 나도 그것쯤은 안다.

하지만 울어야 할 때 울 줄 아는 게 사람이다.

눈물은 통일의 윤활유다.

윤활유를 넣지 않은 기관차는 삐걱거린다.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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