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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운동단체 '또하나의 문화' 동인지 출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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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 천년이 끝날 무렵 많은 사람들은 "21세기는 여성의 시대" 라고 말했다.

이 땅에서 그 말은 유효한가.

1984년부터 페미니즘 운동을 중심으로 인간적 삶의 양식을 담은 대안적 문화를 모색해온 단체 '또 하나의 문화' 는 이 물음에 대해 한마디로 '허황한 것' 이라고 단언한다.

뿌리 깊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은 일상의 척박함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사례들을 한데 모은 것이 2000년 벽두에 열다섯번째로 출간된 동인지 '여성의 일찾기, 세상바꾸기' (도서출판 또 하나의 문화.9천원)이다.

무책임한 사람들이 내건 헛된 약속에 시비를 걸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병폐인 연고주의와 부패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문화.경제의 주체임을 선언하고 있다.

동인지는 '2000년 한국, 여성은 노동자가 될 수 없는가?' 라는 김현미씨(이화여대 아시아 여성학센터 연구원)의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국제통화기금(IMF)구제금융사태 이후 남성은 생계 부양자라는 전통적인 역할이 흔들리고 여성은 사회적 노동자의 지위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상 최대의 경제위기 속에서 여성이 고용직에서 퇴출 되는 비율이 남성에 비해 7배나 됐고 결국 이들은 대거 임시직.시간직.계약직이라는 일과 실업의 경계 지역으로 내몰렸다는 것이다.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홍성희씨는 '여승무원은 왜 미모여야 할까□' 라고 의문을 던진다.

항공사 여승무원의 직업적 전문성은 숙련된 승무원 업무 처리능력에 있지 매력적인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런데도 항공사에서는 여승무원이 표준체중을 넘길 정도로 살이 찌면 경고를 하는 등 외모가 일상적인 감시와 통제의 수단이 되고 있다고 필자는 밝히고 있다.

특집 '살아남기, 바꾸기, 연대하기' 는 경제위기에서 살아남아 일터를 확보하려는 여성의 다양한 노력들, 여성이 하는 일로 여기던 직종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려는 시도들, 여성간에 연대하여 세력화하려는 움직임들이 담겨 있다.

고대 정외과를 졸업한 오선희씨는 처음 컴퓨터를 접했을 때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하였습니다' 라는 메시지를 보고 '다시 사야 하다니…' 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컴맹이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유망고시 길라잡이' 라는 IP사업자로 나서게된 과정을 생생히 소개하고 있다.

동인지는 남성에게 유리한 현 시대상을 꼬집어가면서도 변화하는 환경이 반드시 여성에게 불리하지만은 않다는 희망도 던져준다.

한 일간지에서 벌어졌던 여성 편집국장 추대작전과 다양하고 생동감 있는 일을 구상하고 있는 여고생들의 장래희망 조사 등이 그것.

여성 치과의사.여성 방송구성작가.여성 출판업자 등이 직업적 성취보다 그 뒤에 숨은 애환을 털어놓은 '적응과 성장' 에서는 여성이 일을 갖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조언을 빼놓지 않는다.

1986년 제 2호 '열린 사회 자율적 여성' 을 펴낸 지 14년 만에 또 다시 '여성의 일' 을 화두로 한 이번 동인지에는 커진 목소리와는 달리 지위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사회 속에서도 자신의 일과 주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여성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김국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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