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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처럼 … 1000개 ‘장벽 도미노’ 무너뜨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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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이틀 앞둔 7일(현지시간) 한 여성이 장벽이 설치돼 있던 거리를 지나고 있다. 장벽이 있던 자리엔 판자들이 세워져 있고 그 위엔 자유를 찾아 장벽을 넘으려다 사살된 동독 주민들의 숫자가 연도별로 새겨져 있다. [베를린 AFP=연합뉴스]

독일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브란덴부르크 문 일대는 세계 각국 관광객들로 일년 내내 북적거린다. 특히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하루 앞둔 8일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인파가 이곳을 가득 메웠다. 관광객들은 20년 전 바로 이곳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쌓아 올려진 장벽 위로 동·서 베를린 시민들이 올라가 “우리는 한 민족(Wir sind ein Volk)”이라 외치며 부둥켜 안고 춤을 추었던 역사적 장면을 떠올리며 그날의 감격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서베를린 첼렌도르프에 거주하는 우르줄라 하제케(57)는 “철의 장막을 무너뜨린 가장 드라마틱한 역사의 현장을 성지순례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20년 전 당시 교사였던 하제케는 “소식을 들은 뒤 자전거를 타고 장벽으로 달려가 동베를린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그는 9일 열릴 ‘장벽 도미노 쓰러뜨리기’ 행사를 미리 구경하기 위해 현장을 찾았다. 그의 친구 볼기테 쿠트는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돼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듯이 한국의 ‘철의 장막’도 사라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동독 공산 정권이 ‘반파시스트 보호벽’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쌓은 베를린 장벽은 28년 만인 1989년 11월 9일 민중들에 의해 허물어졌다. 장벽 붕괴라는 대서사시는 베를린과 독일의 동서 분단, 냉전체제가 종식되는 도화선이 됐다. 독일의 운명이 결정되고 세계사의 한 페이지가 새로 쓰인 밤이었다.

한경환 기자

◆그날의 감격 아직도 생생=당시 동베를린에 거주했던 질케 오터그라벤은 “붕괴 소식을 듣고 꿈을 꾸는 것처럼 흥분했다”며 “부모님과 함께 서베를린 지역으로 가 그곳에서 밤새도록 사람들과 어울려 놀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통일 후 서독인 남성과 결혼해 두 자녀를 두고 있다. “동베를린 알렉산더플라츠에서 열렸던 민주화 요구 시위에도 참여했다”는 오터그라벤은 “장벽 붕괴로 더 이상 제약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게 됐고, 감시받을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게 됐다”고 말했다.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에는 이제 장벽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과거 장벽이 지나갔던 자리를 따라 도로 위에 두 줄로 사각형 돌들이 촘촘하게 박혀있고 군데군데 ‘베를린 장벽 1961~1989’라 쓰인 금속 표지판이 붙어 있을 뿐이다.

여기뿐 아니라 베를린 시내에서 장벽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마우어슈페히트’라 불리는 ‘장벽 딱따구리’들이 망치와 끌을 갖고 앞다퉈 장벽을 헐어냈기 때문이다. 장벽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려놓은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제대로 보존된 곳 중 하나다. 슈프레강변 오스트반호프(동역)에서 오버바움 다리 사이 뮐렌슈트라세에 약 1300m의 장벽이 남아있다. 세계 최대의 야외 갤러?堅竪� 한 이곳은 벽화 복원작업 끝에 최근 깔끔하게 새 단장됐다. 에리히 호네커 전 동독 공산당 서기장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입맞춤 장면을 그린 ‘형제의 키스’는 대표작이다. 장벽이 붕괴되기 직전 호네커는 “100년은 더 갈 것”이라고 큰소리쳤지만 결국 1년도 버티지 못하고 권좌에서 쫓겨 났다.

미군 초소가 있었던 체크포인트 찰리 인근, 장벽 공원 등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체크포인트 찰리를 찾은 네덜란드인 에리크 판 마넨(29)은 “당시 아홉 살밖에 되지 않아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역사의 현장을 보기 위해 휴가를 내 달려왔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지구상에는 냉전과 독재가 계속되고 있다며 베를린의 교훈이 이런 나라 국민들에게도 복음이 되기를 바란다”고 희망했다.

1989년 11월 한 독일인이 해머로 베를린 장벽을 부수는 모습. [베를린 AP=연합뉴스]

◆축제 분위기 고조=브란덴부르크 문 일대에선 9일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열린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세계 각국 지도자들을 초청해 이곳에서 ‘자유의 파티’를 연다. 참석하는 정상들의 면면을 보면 잔치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 정상 전원이 참석한다. 아시아 순방을 앞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을 대신 보냈다. 러시아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직접 참석할 예정이다.

메르켈 총리는 7일 “우리 독일인들은 통일을 가능하게 해준 이웃 나라와 동맹국가들을 잊지 않을 것”이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9일 예정된 행사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도미노 쓰러뜨리기’다. 포츠다머플라츠~브란덴부르크 문~연방하원 의사당까지 1.5㎞에 달하는 거리에는 실제 장벽이 있던 길을 따라 2.3m 높이의 화려한 색으로 치장된 플라스틱 도미노 벽돌 1000개가 세워져 있다. 자유연대 운동으로 폴란드 독재 정권은 물론 동독과 소련 등 동유럽 공산주의 세력을 붕괴시키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한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이 첫 도미노 벽돌을 미는 주인공이다. 메르켈 총리는 9일 EU 정상들과 비공식 만찬을 한다. 이 자리에선 리스본조약 비준 완료에 따른 EU 대통령(공식 명칭은 정상회의 임시의장) 선출 문제도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한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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