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통령 한마디에 춤추는 여당 정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은 지난달 26일 당사를 찾은 천영세 민주노동당 원내대표에게 "국가보안법이 있어야 국가안보가 지켜진다고 생각하는 다수의 국민이 있다"며 "여당으로선 양쪽을 보고 균형 잡힌 시각에서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5일 오전 상임중앙위원회의에서 마이크를 잡은 이 의장은 달랐다. 과연 열흘 전에 그런 말을 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는 이날 "보안법 문제를 결말짓지 못한 것은 분단 냉전시대 비극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며 보안법 폐지 추진을 강하게 시사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5일 한 방송 인터뷰에서 "보안법은 폐기돼야 한다"고 발언한 뒤 기류가 급변한 것이다. 이 의장뿐 아니다. 전날까지 '폐지냐, 개정이냐'보다 당내 의견 조율에 주력했던 천정배 원내대표도 "대통령이 보안법을 독재시대 인권탄압의 도구로, 낡은 시대의 유물이라고 지적한 것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며 폐지론을 지지하고 나섰다.

"폐지보다 개정 쪽이 낫다"고 한 이해찬 총리의 발언도 무색해졌다. 이날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폐지가 정부 입장이라고 밝혔다.

폐지냐, 완화냐를 놓고 당내 논의가 활기를 띠어가던 출자총액제한제 논의도 사라져버렸다. 노 대통령이 "출자총액제한제 때문에 기업 투자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고 하면서다. 홍재형 정책위의장은 5일 "더 이상 소모적 논쟁을 할 때가 아니다"며 "흔들림 없이 당론으로 출자총액제한제를 추진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당내 논란 중이던 현안이 노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따라 춤을 추고 있다. 노 대통령은 수차례 "당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열린우리당 역시 "당정 분리가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고 공언해 왔다. 당 일각에선 "과거와는 다르지만 이런 식으로 가면 결국 의원들이 대통령의 거수기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자탄이 나왔다. 당장 한나라당이 비꼬고 나섰다. 남경필 원내수석부대표는 "대통령이 앞장서서 당정분리 원칙을 깨고 있다"며 "미디어를 통해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히는 방식으로 대통령이 여당과 국회를 구속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시민단체와 학계의 시선도 곱지 않다.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연대 윤창현 사무총장은 "국무회의에선 국민에게 분권.분리라고 해놓고 대중을 상대로 대통령의 뜻을 그대로 전파하면 무슨 분권정치의 의미가 있느냐"고 비판했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는 "열린우리당에 당내 리더십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라며 "특히 당내에서 한 사안을 두고 다른 목소리가 나오다 금방 바뀐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신용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