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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산 히말라야 속으로…] 2. 카트만두의 꿈… 서울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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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안녕하십니까.여기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입니다. 저는 나가르코트에 가서 한동안 지내다 방금 돌아왔습니다.나가르코트는 카트만두에서 동쪽으로 32㎞ 떨어진 곳으로 해발 2천1백75m이고,에베레스트가 마주 보이는 풍광이 빼어나기로 유명합니다.그런데 제가 있는 동안은 완전히 안개에 점령당했었습니다.

제가 묵었던 호텔‘평화로운 오두막집’은 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었는데,360도 빙 둘러서 안개에 포위된 상태였습니다.창밖에 두터운 장막 같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고,테라스로 나가면 솜사탕 같은 안개가 얼굴을 매만지다 비켜가곤 했습니다.

추워서 계속 덜덜 떨면서 살았습니다.서울서 가져간 옷을 몽땅 껴입었답니다.방안에서도 바지 두 개,윗옷은 티셔츠부터 시작해서 네 개를 덧입고,그 위에 또 두꺼운 재킷을 걸친 몰골이 상상이 가십니까.

어느날 밤에 모처럼 과감한 결단을 내리고 아무리 뜨겁게 틀어도 찬물이나 다름 없는 미지근한 물에 덜덜 떨며 샤워를 하는데 갑자기 전깃불이 나가더군요.이리 쿵 저리 쿵 받히면서 겨우 촛불을 켰습니다.촛불이 그렇게 밝고 따뜻하다는 것을 생전 처음 알았습니다.맨몸으로 추운 어둠 속에서요.

1월 1일에는 일본 NHK 방송국 사람들이 나가르코트에 와서 에베레스트에 밀레니엄 첫 햇살이 밝아오는 것을 생중계하더군요.미국 CNN에서도 그 그림을 받아 방영했다더군요.나가르코트에 머무는 동안 계속 나도 그림을 그렸습니다.처음 이틀 동안 작업한 것들은 도무지 구제불능입니다.추위와 낯설음으로 바짝 오그라든 상태에서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올 리 없지요.그래도 차차 적응이 되었던지 몇 작품은 얻었습니다.사진도 몇 장 찍었습니다.

에베레스트가 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아쉬움이 남습니다.아마도 히말라야의 정신적 지주인 시바신의 심기가 요즘 꽤 불편한 모양입니다.멋대로 시간을 나눠 밀레니엄 운운하며 문명의 이기로 대자연,태고의 꿈을 찍겠다니 가당하기나 하겠습니까.

오늘은 크리스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그는 ‘평화로운 오두막집’에서 일하는 22살의 청년입니다.네팔은 90년대 초반 민주화 항쟁이 있었지만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사람들의 신분을 묶어둔 상태입니다.그는 네왈족으로 3번째 계급에 속합니다.하루는 방으로 핫팩을 가져오는 그에게 “너의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그는 네팔인 특유의 양쪽으로 흔드는 고개짓을 하면서 꿈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그에게 진짜로 꿈이 없는 것인지,아니면 생각조차 안 해본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에 관해서 조금 털어놨습니다.누나는 결혼했고 밑으로 3명의 형제가 더 있습니다.아버지는 57세인데 몇 년 전부터 아파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막노동으로 하루에 1백루피(1천8백원 정도)를 벌었는데 그 일도 더 이상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크리스나 혼자 뿐입니다. 그는 한달에 1천5백루피(3만원 정도)를 버는데,가끔씩 집에 쌀과 돈을 가져다 줍니다.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고 또한 부끄러웠습니다.

저 역시 이제껏 풍족한 생활을 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혼자서 화려한 식사를 한적도,비싼 물건을 산적도 별로 없습니다.그러나 제게는 원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허접쓰레기 같은 물건들을 사모으느라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나의‘없음’이 차라리 자랑스러웠습니다.그런데 크리스나를 비롯한 네팔인들을 관찰하는 동안 제가 얼마나 철없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나 깨달았습니다.

크리스나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난 아무 것도 꿈꾸지 않아요.단지 오늘을 살 뿐 입니다”이었습니다.그것은 22세의 청년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 달에 3만원 벌어서 여섯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그의 현실이 제게는 꿈보다 더 중요해 보였습니다.

네팔의 시골길을 걷다보면 코흘리개 아이들이 달라붙어서“초콜릿! 루피!”를 외칩니다. 이 나라 왕은 세계에서 7번째 가는 갑부라지요.국민을 이렇게 살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이 나라의 기득권층에 화가 납니다.

네팔은 19세기·20세기·21세기가 한꺼번에 공존하는 나라입니다.신을 모시는 공식 공휴일이 일년에 1백20일이나 된다니 종교국가인 것이 확실합니다.그러나 이들의 국교인 힌두교는 윤회사상을 강조함으로써 신분상승이나 물질에 대한 욕구를 거세했습니다.종교는 불만 있는 사람들에게 야릇한 환상을 부추기고,현실의 고달픔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구실이 되었습니다. 크리스나에게 꿈을 앗아간 것은 바로 네팔의 종교적 꿈이 아니었을까요.

꿈에는 개인적인 꿈과 집단적인 꿈이 있습니다.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로 들어갈 때 한국사회를 짓누르던 불안과 정신적 공황을 지켜보면서 우리 민족의 꿈은 무엇일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인간이 곤경에 처했을 때 꿈은 희망이라는 힘을 줍니다. 꿈이 있다면 적어도 다음 발을 내딛을 길이 보입니다.그런데 그때 우리의 꿈은 무엇이었나요.그리고 21세기의 꿈은 무엇인가요.무조건 잘 사는 건가요.

저는 한국사회를 돌아봅니다.위에서부터 더러운 돈을 챙기고 패싸움을 하니 그 파장이 밑에까지 이르는 나라지요.전화 도청 같은 것을 함부로 하고,길 가던 차도 맘대로 세워서 음주단속을 하는 그런 곳이지요.인권과 도덕성이 흔들리는 판국에 돈만 많이 벌어서 뭐하겠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런 것은 이 다음에 돈 많이 벌고 찾겠다고요.그게 언젠가요.아! 미국이나 일본보다 부자가 된 다음에요.아닙니다.우리는 일본이나 미국보다 잘 살지는 못해도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흔히 부모들은 자식에게 꿈을 심어줘야 한다고 말합니다.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아이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요즘 애들은 너무 많은 것을 배워서 자신이 진짜로 뭘 좋아하는지 혼동을 느낍니다.부모들은 내 자식이 뒤처질까봐 옆집 애가 무엇을 하면 똑같이 시킵니다.

그리고 내 애가 천재 끼를 보인다고 은근히 자랑합니다.그런데 자기 자식이 천재일 때 옆집 애도 천재인 걸 아십니까.비슷비슷한 수준의 아이들끼리 경쟁심을 유발하고,결국 자신과 비슷한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는 것만 배우는 것은 아닌지요. 빈곤의 풍요 속에서 피어난 꽃이 더 향기롭고 아름다운 법입니다.어른들이 원하는 방식의 꿈을 심어 줄 것이 아니라,아이들의 절대가치를 존중해 주고 스스로 꿈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세계는 꿈을 꾸는 사람에 의해서 변해왔습니다.우리는 매스컴이나 위인전을 통해서 꿈을 실현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꿈은 전염성이 강합니다.성공한 정치가나 운동선수 슈퍼모델을 보면서 아이들은 꿈을 키웁니다.아이들이 부러운 것은 그들 자체일까요,아니면 그 밖의 부수적인 걸까요.

가끔 누군가에게 꿈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그렇다면 문제는 심각합니다.내 꿈이 진짜로 나의 꿈인지 한번쯤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꿈은 미래를 위한 전망이고 현재를 지탱하는 버팀목입니다.그러나 자신의 진정한 실체를 찾지 못하고 꿈만 꾼다면 그게 또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리처드 버크의‘갈매기의 꿈’에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곳에 갈 자유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있고 싶은 곳에 있을 자유도 있다.”갈매기 조나단은 높이 날아 올랐지만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생각합니다.‘어쩌면 꿈이라는 것은 높이 날아오르는 행위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난 그저 하나의 갈매기일 뿐이지,나는 걸 좋아하는…’

글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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