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25) 깨끗한 뒤집기

김병원(金昞源.71.한국화낙 상임고문)대통령 과학기술담당 비서관은 내가 제시한 레이저 프로젝트 방안이 매우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내 주장에 공감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는 마침내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았다.

"사실 레이저 프로젝트에 관해 오네스트 신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출한 것과 과학기술처가 레이저 연구기관들의 연구 계획서를 종합해 올린 보고서를 모두 다 받아 봤어요. 그런데 두 보고서 모두 너무 실현 가능성이 없더라구요. "

처음 만난 내게 이런 얘기까지 한다는 것은 나와 의견을 같이 한다는 뜻이었다. 시쳇말로 '왕따' 를 당하던 나는 뜻밖의 우군(友軍)을 만난 셈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상으로 가더니 차트 하나를 가져왔다. 그러면서 "이게 바로 오네스트 신이 朴대통령께 브리핑한 보고서입니다" 하며 내게 건네줬다.

모두 5장짜리였다. 핵심은 레이저 핵융합을 통해 당시 우리나라의 현안인 에너지 문제 등을 해결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게 "오네스트 신의 보고서가 실현 가능성이 있느냐" 고 물었다. 나는 한 마디로 "가능성이 없다" 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그 역시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며 동감을 표시했다.

金비서관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국방과학연구소(ADD)안은 비용도 별로 안 들 것 같고 현실성이 있다" 며 "아무래도 레이저 프로젝트의 최종안으로 ADD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고 말했다. 그토록 말썽 많던 레이저 프로젝트의 큰 가닥이 잡히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76년 6월 하순 어느날. 金비서관이 "레이저 프로젝트 최종안으로 ADD안이 채택됐다" 고 전화로 알려 왔다. 비용은 가장 적게 들면서 실현 가능성이 큰 점이 높게 평가됐다는 것이었다.

하버드대 박사 출신인 오네스트 신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넉 달 동안이나 계속됐던 지리한 싸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되고 보니 허탈하기도 했다. 이번 싸움은 대다수 과학계 실력자들까지도 오네스트 신의 편을 들던 상황이었기에 나로서는 너무도 버겁고 외로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청와대 金비서관이 그토록 불리하던 상황을 완전히 역전(逆轉)시켜 놓은 것이다.

이 사건이 일단락된 지 얼마 후 오네스트 신은 그동안 자신을 적극 옹호했던 인사들에게 아무 말도 없이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렸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짐은 원자력연구소에 두고 몸만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후 몇달이 지나 심문택(沈汶澤.98년 작고)ADD소장이 미국을 다녀와서 오네스트 신에 관한 소문을 내게 들려줬다.

"한인 과학자들 사이에서 그에 관한 평판이 좋지 않더구만. 박사학위 논문의 독창성이 아주 떨어진다는 얘기가 파다해.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 인물이었던 것 같아. 내가 사람을 잘못 봤지. " 그는 처음 오네스트 신이 제시한 레이저 프로젝트를 내가 반대하는 바람에 ADD가 이를 주관하지 못하게 되자 나를 크게 원망했었다. 그런 저간의 사정 때문인지 그의 말 속에는 나에 대한 사과의 뜻이 묻어 있었다.

이 사건 말고도 당시 과학계에는 정치인들을 등에 업고 한탕 해먹으려는 사기극들이 빈발(頻發)했다. 75년 여름, 청와대 등 주요 공공기관에 적외선 감시장치를 설치하면 물샐틈 없는 경호가 가능하다고 속여 朴대통령의 결재까지 받아낸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다. 한 업자가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 수십대의 일본제 적외선 감시장치를 팔아 먹으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서정욱(徐廷旭.66.과학기술부장관)ADD 전자무기개발부장과 내가 협의한 끝에 딱 한 대만 들여오게 한 다음 1년간 기후 변화에 따른 성능시험을 해봤다. 그 결과 엉터리임이 밝혀졌다.

그런가 하면 인천 앞 바닷물을 기름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결국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한 정치인들의 무지(無知)가 이같은 소동이 일어나도록 한몫 거든 셈이다.

글=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