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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 몬테로 '시대를 앞서간 여자들…' 출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여성 선구자들은 '불행한 천재' 였을까. 스페인 태생의 언론인이자 소설가 로사 몬테로는 이런 질문에 머리를 흔든다.

그들도 보통 여성들처럼 질곡의 삶 속에서 타협과 거부를 반복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남성과 달리 이들의 타협과 거부는 당시 사회적 윤리로 덧칠해졌다.

로사 몬테로가 쓴 '시대를 앞서간 여자들의 거짓과 비극의 역사' (원제 Historias de Mujeres.작가정신.8천원)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편견과 관습을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아간 여성 15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여성 페미니스트가 썼으면서도 등장 인물들의 삶을 두둔하거나 옹호하는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슬픈 눈빛으로 투명한 어항을 들여다 보듯 여성의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어 설득력을 더한다.

몬테로가 자국의 유력 일간지 '엘 파이스' 지 일요판에 연재한 칼럼을 묶어 만든 이 책은 지난 1995년 스페인과 멕시코, 아르헨티나에서 동시 출간돼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었다.

국내판은 문학평론가 정창씨가 번역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18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문학.예술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고 나름대로 족적을 남겼지만 동시대인들의 눈에는 '비정상적인' 여자였다.

작가는 이들의 거짓과 비극으로 점철된 생애를 애써 다룸으로써 그 시대의 모순과 비합리성, 그리고 성차별의 역사를 고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책을 보면 등장 여성들의 삶을 정밀하게 탐색하기 위해 이들의 전기.자서전.서간문.일기 등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분석한 저자의 노력이 느껴진다.

영국의 추리작가로 문학적 성공을 거둔 애거사 크리스티(1890~1975)는 스스로 감동적인 인물로 만들기 위해 끝없이 덧칠한 인물로 묘사돼 있다.

40대가 되어 몸이 불어나자 나머지 반생 동안 자신의 변한 모습을 감추고자 기를 썼으며,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기자 추리소설의 주인공처럼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는 근대 페미니즘의 토대가 된 '여성의 권리에 대한 주장' 을 발표해 당대 유럽에서 유명세를 탔지만 지금은 '프랑켄슈타인' 의 작가 메리 셸리의 어머니로만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두 번의 자살 기도와 사생아를 낳았다는 비정상적인 사생활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한 세기 반 동안이나 역사적.사회적으로 매장당했기 때문이다.

'요람의 노래' 등으로 20세기 초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극작가로 통했던 그레고리오 마르티네스 시에라의 모든 작품은 그의 아내 마리아 레하라가(1874~1974)가 대신 써 준 것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모든 성공과 명예를 바치며 '침묵의 작가' 로 살았다.

그러나 비정한 남편은 정부와 함께 그녀 곁을 떠나가 버린다.

레하라가는 자신의 삶에 대해 자서전에서 "결혼한 여자, 젊은 여자, 행복한 여자, 모든 여자를 지배하는 이런 비굴한 긍지가 진정으로 한 남자를 원하는 나를 괴롭혔다" 고 술회했다.

그 밖에도 천재적인 재능을 소유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면서 음악가인 구스타프 말러의 아내가 되려고 음악을 버린 오스트리아의 알마 밀러(1879~1964), 문학을 위해 타인의 삶을 난도질한 양성애자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 남장을 하고 아프리카 사막을 누빈 무정부주의자의 사생아 이사벨 에버하트(1877~1904)등의 파란만장한 삶이 생생하게 소개돼 있다.

저자는 그 시대의 사회적 편견과 고정관념에 맞서 싸우거나 때로는 힘없이 주저 않아야 했던 여성들의 삶을 찾아나선 탐사가로서 우리에게 하나의 인생지도를 보여준다.

김국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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