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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신춘중앙문예 희곡 당선작] 김종광 '해로가' (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3장>

2장의 무대 배경과 거의 동일하다. 쓰레기 더미가 한 쪽에 있다. 쓰레기 더미라는 것을 확실히 해야된다. 쓰레기 더미 앞에 흔들의자가 있고, 환경미화원이 앉아 있다. 환경미화원은 노란색 우비를 입고 있으며, 한 손에는 소주를, 다른 손에는 빗자루를 들고 있다. 4장이 끝날 때까지 빗자루를 놓아서는 안 된다. 흔들의자 밑에는 소주병이 열 병 이상 있다.

무대에 등장한 희철과 고양이. 이들은 여전히 약 5m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희철은 환경미화원 앞에서 우뚝 멈춰 선다. 고양이도 멈춘다.

미화원 : (팔뚝으로 입가를 문지르며)자네를 날마다 보는군.

희 철 : (말없이 웃는다. )

미화원 : 오늘도 그곳에 가나?

희 철 : (고개를 끄덕인다. )

미화원 : 한 잔 하려나?

희 철 : 늘 그렇게 물으시는군요. 저는 언제나처럼 '싫습니다'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미화원 :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내가 왜냐고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나?

희 철 : 글쎄요.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미화원 : 그럼 한 번 물어보고 싶군. 자넨 왜 술을 안 마시겠다는 건가? 내가 술에 독약이라도 탄 줄 아나?

희 철 : 술을 먹으면 공부를 할 수가 없어서요.

미화원 : 공부? 자네 방금 공부라고 말했나?

희 철 : (고개를 끄덕인다. )

미화원 :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미친 듯이 웃는다.

웃음을 그치고) 이토록 웃기는 유머를 들은 게 대체 몇 년 만이지! 공부라니? 아직도 공부를 하겠다는 미친놈이 있었나? 믿을 수가 없군. 믿을 수가 없어. 그래, 대체 무슨 공부를 하나?

희 철 : 인생 공부를 하지요.

미화원 : 인생 공부?

희 철 : 그래요. 인생 공부.

미화원:더 자세히 말해 주게. 이거 원 하도 웃기는 얘기가 돼놔서 꼭 기억하고 싶군. (웃는다. )

희 철 : 자세히 말하자면, 아저씨처럼 되지 않기 위한 공부를 하지요.

미화원 : (웃음을 그치고) 내 직업이 어때서? 아직도 직업에 귀천이 있나?

희 철 : 누가 직업을 말하나요. 아저씨의 인간성을 말하는 거지요.

미화원:(일그러지는 얼굴. 소주를 마신다. 빈 소주병을 쓰레기 더미로 집어던진다. 의자 밑에서 새 소주병을 꺼낸다. 이빨로 뚜껑을 딴다. 한 모금 들이켠다. 낮은 목소리로 우울하게)자네가 내 인간성을 아나?

희 철 :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미화원 :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 따위 말을 하나?

희 철 : 왜 그렇게 화를 내시는데요. 정말로 열 받는 건 나란 말입니다.

미화원 : 자네, 가만히 보니까 나를 놀리고 있군. 싸가지 없는 놈.

희 철 : 그럴 리가요.

미화원 : 그럴 리가요? 너 몇 살이나 처먹었어?

희 철 : 5반세기와 서른 살의 중간쯤.

미화원 : 꺼져. 나를 더 이상 열 받게 하지마. (소주를 들이켠다. 빈 소주병을 쓰레기 더미 위로 집어던진다. 의자 밑에서 새 소주병을 꺼낸다. )

희 철 : (색에서 망치를 꺼낸다. )

미화원 : (소주병을 든 손으로 망치를 가리키며)그걸로 어쩔 셈인가?

희 철 : 당신의 두뇌를 박살낼 겁니다.

미화원:(웃으며)그렇다면 나도 꽃상여를 타게 되겠군.

희 철 : 그런 건 잘 몰라요, 나는.

미화원 : 자네도 보았나□ 오늘도 어김없이 꽃상여가 지나가던데. 아까 이곳을 지나쳤으니 지금쯤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고 있겠군. 독도쯤 갔을 거라고. 자네 알고 있나? 사람들이 날마다 사라져 가고 있다는 걸. 꽃상여를 타고서 말이야. 이제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런데 자네가 이래서야 되겠나. 하나라도 더 살아남아야지. 안 그런가? 자네도 살고, 나도 살고.

희 철 : 듣기 싫어요. 말 돌리지 말아요. (망치를 치켜들고 미화원에게 바싹 다가선다. )

미화원 : (겁에 질려서)정말로 나를 칠 셈인가?(소주를 들이켠다. 팔뚝으로 입가를 훔친다. 떨고 있다. )

희 철 : (망치를 치켜든 채 떤다. )

미화원 : (체념한 듯)자네는 정말 날 칠 수 있는 놈 같군.

희 철 : 잘 보셨어요.

고양이 : (길게 연속적으로 운다. )

희 철 : (고양이를 쳐다본다. )

미화원 : (희철의 면상을 빗자루로 내려친다. )

희 철 (얼굴을 감싸쥐고 쓰러진다. )

고양이 (울음 그친다. )

미화원 (뛰어 달아난다. 퇴장. )

희 철 : (천천히 일어선다. 미화원이 사라진 쪽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땅에 떨어진 망치를 주워든다. 망치를 이리저리 살핀다. 망치를 쓰레기 더미 위로 집어던진다. )

희 철 : (천천히 퇴장. )

고양이 : (천천히 퇴장. )

<4장>

동일한 무대 배경. 한 칸 짜리 공중전화부스가 있다.

희철과 고양이, 여전히 약 5m의 간격을 유지한 채 걷고 있다. 희철, 공중전화부스 앞에서 멈춘다. 몹시 긴장한다. 공중전화부스로 들어간다. 희철은 떤다. 사내아이 뛰어서 등장. 희철에게로 다가와 몹시 헉헉댄다.

아 이 : 어떤 여자를 기다리지 않으세요? 키는 1m60㎝가 조금 넘고 ,가슴은 한없이 크고, 아! 한 마디로 책에 미친 여자요.

희 철 : 기다리는 건 아니고 하여튼 여기 여자가 있어야 하는데, (손가락으로 공중전화부스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오늘은 없네.

아 이 : 맞아요. 내 잘난 누나예요. 미쳤죠. 만날 공중전화 앞에서 벌리는 여자.

희 철 : 네 누나라고?

아 이 : 그렇다니까요. 병신됐어요.

희 철 : 누구?

아 이 : 누군, 누구예요. 아저씨가 기다리는 내 누나지.

희 철 : 왜?

아 이 : 아빠가 돌아왔지 뭐예요. 책을 산더미로 사온다고 해 놓고선, 거지가 돼가지고 돌아왔어요.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아빠 능력에 뭘 하겠어. 하여튼 아빠가 누날 사창가에 팔아버리겠다고 했어요.

희 철 : 그래서?

아 이 : 아, 뭘 그래서는 그래서예요. 누나가 팔려가기 싫다고 발버둥치니까 아빠가 홱 돈 거지요. 그렇다고 부엌칼로 눈을 빼내냐. 어휴. 그래서 지금 누나는 눈 싸매고 누워 있다 이거예요. 아시겠어요?

희 철 : 신고해야지.

아 이 : 누굴? 아빠요. 신고는 무슨 얼어죽을 신고예요. 아빠는 누나 안구 팔아먹는다고 물 건너갔어요. 일본으로 갔는지, 중국으로 갔는지. 아무튼 아빠는 웃기는 사람이라니깐. 요새, 젊은 여자 안구가 인기 절정인 건 알아갖고. 몇 백은 문제 없다나. 하여튼 머리가 그런 쪽으로만 돌아가는지.

희 철 : (제법 긴 침묵).

아 이 : (옷을 벗는다. 제 옷을 다 벗고서는 희철을 벗기려고 한다. )

희 철 : 뭐하는 거야?

아 이 : 뭐하긴 뭐해요. 아저씨하고 누나하고 만날 하는 거하죠.

희 철 : 넌 남자잖아. (완전히 발가벗겨졌다. )

아 이 : 뭘 그런 걸 따져요. 날 여자로 생각하면 되잖아요. 제 눈에 안경이란 말도 몰라요.

희 철 : 그래도 넌 남자야, 임마! 게다가 미성년자잖아. 지금 나더러, 동성 연애에 미성년자 추행을 동시에 범하라고?

아 이 : 거 참, 아저씨 말 많으시네, 아저씨는 자위 행위도 안 해봤어요. 나를 미스코리아라고 생각하고서 배설하라니깐!

희 철 : 난 못하겠다.

아 이 : 해야 돼요! 하기 싫어도.

희 철 : 왜, 임마! 내가 하기 싫으면 안하는 거지.

아 이 : 누난, 누난 어쩌고? 누나는 누가 책임져?

희 철 : 나더러 책임지라고? 내가 뭘 어쨌길래?

아 이 : 날마다 섹스를 했잖아. 그 대가로 책을 줬잖아. 누난 당신 때문에, 섹스중독에 책중독까지 걸렸다고. 죽을병은 다 걸렸단 말이야.

희 철 : 내가 언제 임마! 네 누난 나를 만나기 이전에, 책중독에 걸려 있었고, 섹스중독도 잘은 모르겠지만, 하여튼 나는 책임 없어.

아 이 : 아냐! 당신을 만난 뒤부터 그랬어.

희 철 : 억지 쓰지마!

아 이 : 증거를 댈게.

희 철 : 증거? 그래 대 봐.

아 이 : 누난 당신을 사랑해.

희 철 : 그게 증거야?

아 이 : 아주 훌륭한 증거지.

희 철 : 믿을 수 없어.

아 이 : (더이상 말다툼하기 싫은 듯. 견본 밀크로션병을 내밀며) 누나가 이걸 가져 가라더군요. 아플거라고.

희 철 : (받아든다. )

아 이 : (등을 돌리고, 엉덩이를 내민다. ) 자! 어서 내 항문을 공격하라고요. 순진한 척 마시고.

희 철 : 책은 그냥이라도 줄 수 있어.

아 이 : 내가 그냥 받을 수 없어요. 대가를 치러야 한단 말입니다.

희 철 : 정말 못하겠어.

아 이 : 당신 정말 자꾸 이럴 거야! 어수룩한 척 그만 하라고. 아무도 안 속아!

희 철 : 그냥 주겠다니까.

아 이 : 안 된다니까요. 대가를 가져가요. 당신, 목숨 걸고 책 훔치는 거 다 알아요. 당신이 누나에게 준 책 껍데기에 도서관 마크가 찍혀 있더라고요.

희 철 : 대가를 치르는 게 너희 집안 내력이냐?

아 이 : 정보사회니까요.

희 철 : 네 누난, 자본주의사회라고 했지. (견본 밀크로션병의 마개를 연다. 손바닥에 밀크로션을 쏟는다. 사내아이의 항문 부근을 로션이 묻은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문지른다. 아이를 허리 부근까지 들어올린다. )

희철이 행동하는 동안 서서히 암전. 무대 어두운 가운데, 고양이 소리, 아이의 비명소리. 희철의 신음소리 등이 약 3분여 동안 어우러진다. 소리가 그치고 서서히 무대가 밝아진다. 아이는 공중전화 부스 바닥에 발가벗은 채 주저앉아 있고 희철은 옷을 입고 있다.

아 이 : (울먹이며)아퍼.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어.

희 철 : (색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아이에게 건넨다. )

아 이 : (책을 꼭 껴안는다. )

희 철 : 앞으로 어쩔 셈이냐?

아 이 : 뭘요?

희 철 : 네 누나 말이다.

아 이 : 난 누나가 엄마 같아요. 아니, 엄마인지도 몰라. 어쨌거나, 누나든 엄마든, 상관없어요. 누나를 하루라도 더 살게 할거야.

희 철 : 차라리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아 이 : 내가 지금 항문만 안 아팠어도 당신 주둥이를 날렸을 걸!

희 철 : 섹스 중독에, 책 중독에 네가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은 경우가 있어. 살다 보면.

아 이 : 당신이 나이를 얼마나 드셨는지 모르지만, 태어났으면 어떻게서든 살 때까진 살아야지. 도대체 왜 태어났는데. 살라고 태어난 거 아닌가?

희 철 :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야. 태어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았어.

아 이 : 몰라요. 다른 사람이 죽든지 말든지 난 살아야겠어. 누나도 살고 나도 살고. 누나의 섹스중독은 내가 해결해줄 수 있어요. 나도 어엿한 남자라고요. 문제는 책중독이라고요. 그러니까 당신이 조금이라도 인정머리가 있으면, 내 항문에다 날마다 누나한테 했던 것처럼, 배설해줘요. 대신 책을 줘요. 당신이 목숨 걸고 책 훔친다는 거야 나도 알지만…….

아 이 : (비치적거리며 일어선다. 옷을 입는다. 공중전화부스에서 나와 걸어간다. )

고양이 : (운다. )

희 철 : (뛰어가 아이의 어깨를 붙잡으며)내일은, 내 일이 온다면 말이야. 내일부터는 네 누나가 나오라고 해! 내가 섹스도, 책도 다 해결해 줄 수 있어.

아 이 : (믿을 수 없다는 듯)내가 말했잖아요. 누난 애꾸라구요.

희 철 : 알아. 애꾸라도 좋아. 네 누나를 내보내. 넌 안돼.

아 이 : 왜요? 내 항문이 맛없었나요?

희 철 : 그렇다고 해두자. 난 네 누나를 원해.

아 이 : 그래요. 내 항문이 맛없었겠죠. 누나 거기 맛은 인터넷 회로 같았겠죠. 당신이 그 맛에 길들여졌으니, 내 항문 맛은 오죽했겠어요, 4벌식 타자기 맛이었겠죠.

희 철 : 그래. 그렇다고 해 두자. 누나를 내보내.

아 이 : 당신도 뻔히 알면서 왜 그런 말을? 설마 경찰 포고문 내용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불구자와의 전쟁 선포문 말예요. 이 땅의 모든 불구자를 사회불만 세력으로 간주하여 체포하는 즉시 독도수용소에 격리시키겠다는 그 무식한 포고문 말예요. 누난 애꾸, 즉 사회불만 세력 1순위가 돼버렸다고요. 당신이 정말 경찰로부터 누날 지켜줄 수 있는 수컷이라고 자신해요? (비꼬는 투로)왜 대답을 못해요?

희 철 : (잠시 침묵 뒤에)지켜줄 수 있어.

아 이 : 어떻게요?

희 철 : 사랑으로.

아 이 : 사랑? 웃기네요. 정말 오래간만에 가슴을 울리는 유머네요. (미친 듯이 웃는다. )

희 철 : 난 네 누나를 원하니까 네 누나더러 나오라고 해!

아 이 : 미쳤어 당신? 누난 이제 여자도 뭣도 아니야. 사회 전복 기도 세력 1순위일 뿐이야. 불구자라고, 알겠어?

희 철 : 네 누난 여자야, 여자!

아 이 : 불구자라니깐. 애꾸눈이라고. 위험 세력이라고!

희 철 : 다 거짓말이야. 매스컴이 사기친 거라고. 경찰 대장이 그런 무식한 포고문을 내다니, 그건 말도 안돼. 헛소문이야, 헛소문. 난 한번도 체포된 불구자를 본 일이 없다고!

아 이 : 난 봤어!

희 철 : 어디서? 언제?

아 이 : 날마다.

날마다 봤어! 꽃상여, 그게 불구자들을 호송하는 거라고!

희 철 : 꼬마야, 넌 헛것을 봤어!

아 이 : 아니야, 내 시력은 양쪽 모두 2.0이라고!

함 께 : (갑자기 침묵. 서로를 노려본다. )

아 이 : 누나에게 말해보죠.

희 철 : (고개를 떨구며)고맙다.

아 이 : (고개를 쳐들며)그런데 당신 정말 우리 누나를 사랑해요□

희 철 : (잠시 생각한 뒤에 고개를 저으며) 아니, 아닌 것 같애. 다만 갑자기 그녀가 안 나오면, 날마다 일어나던 일이 안 일어나면 무서울 것 같아서.

아 이 : 당신도 뭔가에 중독됐군요.

희 철 : 그런가! 너도 뭔가에 중독된 것 같다.

아 이 : (울상으로)항문이 아프군요. 얼른 가서 누나한테 항문을 쓰다듬어달라고 해야겠어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는데, (밝아진 얼굴로) 누나가 엄마 같아요. 어쩌면 진짜 엄마인지도 모르죠.

희 철 : 넌 누나중독에 걸렸구나!

아 이 : 아무려면 어떤가요. 아, 참 조심하세요. 목숨 걸고 당신이 책을 훔치는 거, 늘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하고픈 말은 그러니까 진짜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거죠. 당신이 람보 같은 영화주인공은 아니잖아요? 그러다 정말 죽는다고요.

희 철 : 고맙다.

아 이 : 그러고 보면 당신은 책 훔치는 중독에 걸렸군요.

희 철 : 그곳의 중독이겠지.

아 이 : (서서히 걸어 퇴장한다. )

희 철 : (아이를 바라본다. )

고양이 : (운다. )

희 철 : (고양이를 본다. )

서서히 무대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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