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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는 새천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오혜란 사무총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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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새 천년을 시작하는 대망의 2000년은 용의 해다. 내년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용띠가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슨 띠냐를 참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무슨 띠냐를 많이 따지는 경향이 있다. 용띠나 범띠.말띠 여자는 팔자가 드세다는 말을 자주 듣게된다.

그 결과로 용띠나 범띠.말띠 해에 태어나는 아이의 성비는 다른 해보다 훨씬 심각하게 남초현상을 보인다.

실제로 범띠해였던 86년에는 성비가 1백11.7, 용띠해였던 88년에는 1백13.3, 말띠해였던 90년에는 1백16.5로 나타나 자연성비인 1백5내지 1백6을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극단적인 예로 강남의 어느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의 성비가 2:1로 나타났는데 현재 초등학교 5학년생들이 88년 용띠생들인 것이다.

엄마의 태안에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이 세상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사라져간 태아의 수가 몇만명에 달했다는 사실을 세계가 알게된다면 우리나라를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않은 일이다.

힘들게 살아야하는 세상을 경험한 여자들이 '남자로 태어나는 것이 좋겠다' 는 생각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많은 엄마들이 기왕이면 아들을 낳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보다 근본적으로는 부계혈통을 우선시하는 호주제가 이같은 성비 불균형을 초래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집안의 중심은 남자여야 한다는 전근대적 발상에서 비롯된 호주제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남아선호 사상이 근원적으로 없어지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한 가족에는 기둥이 있어야 하고 그 기둥은 남자인 것이 당연하다는 법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한 남성우월주의가 수그러질 수 없고 남성중심의 가부장 체제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양성평등이 이뤄지는 사회가 미래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이라는 데에 이견을 갖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가오는 새 천년의 첫 출발점이 되는 밀레니엄 베이비 세대도 기형적인 성비로 일그러진다면 서글픈 일이다. 이는 미래사회의 모습을 시작부터 일그러뜨리는 일이다.

자연의 성비가 그대로 유지되는 자연스런 사회. 내가 바라는 소박한 새 천년의 모습이다.

오혜란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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