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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값 폭락에 뿔난 농민들 거센 반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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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4일 전남 영광농협 앞에서 농민들이 쌀값 폭락에 항의하며 벼 포대를 쌓고 있다. 농민들은 “80㎏짜리 한 가마 쌀값이 13만원대까지 떨어졌다”고 말했다. [프리랜서 오종찬]

4일 오후 전남 영광군 영광읍 농협 앞. 농민 20여 명이 농가에서 차량에 싣고 온 벼 포대들을 차곡차곡 쌓았다. 일부는 천막을 치며 장기간 농성할 채비를 했다. 농민 이문형(46·영광군 대마면)씨는 “농자재와 기름값에다 물가가 계속 올랐는데, 쌀은 오르기는커녕 한 가마(80㎏)에 13만원대까지 떨어졌다”며 울상을 지었다.

전국 곳곳에서 농민단체들이 벼를 시·군청이나 농협 청사 앞에 쌓은 채 천막 농성을 하고 있다. 일부 농민은 벼를 도로에 뿌려 버리는가 하면 논의 벼를 갈아엎거나 불태우고 있다. 농협 종합미곡처리장(RPC) 출입구를 트랙터로 봉쇄, 벼와 쌀의 반입·출을 막는 곳도 있다.

농민들의 반발은 11일 농민의 날을 전후로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17일에는 서울에서 대규모 전국농민대회를 열 계획이다. 황금 들녘에서 가을걷이가 끝나가고 있지만, 쌀값 하락으로 농민들의 얼굴은 수심에 차있다.

4일 전남도에 따르면 지난달 평균 산지 쌀값(80㎏ 기준)은 14만1000원으로, 지난해 10월 15만8000원보다 1만7000원(10.8%) 떨어졌다. 추수기에 벼를 사들여 보관하면서 도정해 쌀을 시중에 내는 RPC들이 매입하는 벼 값(40㎏ 기준 평균 잠정 가격, 내년 1월 정산)은 경남의 경우 4만3200원으로 지난해 이맘때 5만1000원보다 15.2%(7800원) 하락했다. 충남에선 지난해 5만2000원가량이던 게 최근 4만5000원 안팎으로 떨어졌다. 지역별로 다소 차이가 있지만, 모두 지난해 수확기에 비해 값이 크게 밑돌고 있다.

◆원인은=쌀값 폭락의 주 원인은 공급 과잉이다. 쌀 농사가 6년째 풍작이 이어져 올해 전국 생산량은 평년 457만t보다 많은 468만t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내년 예상 소비량은 437만t(식량용 358만t, 가공용 31만t, 종자와 기타 48만t)으로 공급이 31만t이나 초과한다. 전국 쌀의 19%를 생산하는 전남의 경우 수확량이 88만6000t이다. 그러나 정부의 공공비축미 매입은 12만t, 농협·민간 RPC들의 매입은 42만9000t이다. 나머지 33만7000t은 농가가 직접 소비하거나 스스로 시장에 내다 팔아야 한다.

2008년과 그 이전 쌀의 재고 누적도 쌀값 하락을 부채질하고 있다. 전국 재고 물량은 82만t에 이른다. 쌀 소비는 감소 추세를 이어가고 있다. 국민 1인당 1990년 한 해 119.6㎏이던 게 지난해 75.8㎏으로 떨어졌다.

농민단체들은 공공 매입 물량 확대 외에 대북 쌀 지원 재개도 주장한다. 전국농민회 부산·경남연맹의 제해식 회장은 “쌀 대란 해결의 가장 확실한 대책 중 하나가 대북 쌀 지원의 재개”라고 말했다. 매년 수십만t씩 북한으로 보내 소진했으나 이를 2년째 중단하는 바람에 재고가 급증해 쌀값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근본 대책 없나=농림수산식품부는 소득 안정 장치가 있으므로 농민들이 너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벼 농사 여부와 관계없이 논 ㏊당 평균 70만원의 고정 직불금을 지급하고 있다. 시장 가격이 목표 가격(80㎏ 17만원) 이하일 경우엔 변동 직불금으로 차액의 85%를 보전해 주고 있다.

정부는 평년작의 초과 물량(11만t)을 사들여 시장에 유통되지 않도록 하고, 정부와 농협·민간 RPC의 매입량도 늘릴 방침이다. 이에 대해 정영섭(40) 전국농민회 광주·전남연맹 사무처장은 “목표가격 17만원은 2005년에 책정돼 그 이후 생산비나 물가 인상분이 반영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방자치단체들도 갖가지 대책을 내놓고 있다. 벼 재배면적이 18만7000㏊로 전국에서 가장 넓은 전남도는 2014년까지 2만㏊에 대해 종묘·비료 값을 지원, 약초·콩·울금·석류·무화과 등으로 작목을 전환하기로 했다. 경북 문경시도 2012년까지 논 5228㏊의 13%인 710㏊를 시설하우스단지와 과수원으로 바꾸기로 했다.

다양한 쌀 가공식품 개발을 통한 소비 촉진도 절실하다. 지난해 국내 쌀 생산량의 6%만 가공식품 생산에 쓰였다. 일본은 그 비율이 14%다. 남재희 전남도 쌀마케팅담당은 “밀가루를 대신할 수 있는 쌀가루를 만드는 제분공장 건립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이해석·서형식·황선윤 기자,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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