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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생명 가득한 정현종 시세계…시선집 잇따라 출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 (시 '섬' , 78년 시집 '나는 별아저씨' 중에서)

80년대 카페의 낙서장에 곧잘 등장했던 단 두 줄의 시 한 편. '섬' 의 시인 정현종(60.연세대 국문과교수)씨가 이 달 중순 회갑을 맞았다.

세기말과 천년말이 아니더래도 문단의 12월은 바쁘고 스산하게 마련인데도, 유독 시인의 주변에는 단단한 훈기가 감싸고 돈다.

올 여름 펴낸 '갈증이며 샘물인' 까지 8권의 시집을 한데 묶은 '정현종 시전집1.2' (문학과지성사.각 1만2천원, 1만원), 대담.평론.문우(文友)들의 산문 등이 실린 '정현종 깊이읽기' (이광호엮음.문학과지성사.1만2천원), 연세대출신을 비롯한 후배 문학인 20명의 정현종론을 모은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 날 때' (문학동네.1만원)가 '연달아 '출간돼, 자연과 생명의 교감을 꿈꿔온 시인의 35년 문학을 한자리에서 돌아보게 하는 덕분이다.

시 '섬' 의 대중적 인기와 89년 네번째 시집의 제목 '사랑할 시간이 많지않다' 덕분에 정씨는 언뜻 연애시인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다양한 논자들이 읽어내는 그의 문학의 핵심은 생명에 대한 철학적 사유다.

연세대 철학과를 다니던 65년 스승 박두진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발표한 시 '독무' 는 철학적 상상력이 두드러졌던 작품. 작고한 평론가 김현은 80년대 중반 "정현종의 시사적 자리는 오십년대를 휩쓴 서정주의 토속적 여성주의를, 유치환.박두진.김수영의 한문투 남성주의와 서구적 구문법에 의지한 개인주의로 극복한 곳" 이라고 평했다.

이후 그의 시적 상상력은 한결 구체적인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왔다.

평론가 이광호씨는 이를 '우주와 에로스적인 친화' 라고 표현한다.

초기의 철학적 사유와 90년대의 자연 친화적인 태도 사이에는 언뜻 단절이 있을성싶지만, 후배들은 오히려 지속성을 읽어낸다.

"혹자는 관념성에서 구체성으로, 비극성에서 낙관성으로, 난해함에서 평이함으로 이월되었다고 진단하지만, 그 변화는 그의 끊임없는 자유 의지와 생명 존중의 생각이 숱하게 변용된 것일 뿐" ( '사람이 풍경으로…' 중에서)이라는 것이다.

시와 생명을 직결시키는 시인의 견해는 시인 자신의 시론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는 시를 읽는다기보다는 시를 숨쉽니다…숨은 말할 것도 없이 생명의 가장 확실한 징표입니다…우리의 의식과 감수성이 충분히 신선하고 민감한 때 우리가 정말 살아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시는 이러한 신선함과 민감성을 회복시키는 숨결입니다…그런데 숲이 산소의 원천이듯이, 시의 숨의 원천, 따라서 우리의 숨의 원천이 꿈입니다" (82년 스톡홀름대학 한국현대문학 심포지엄 주제발표문중에서)

이렇게 돌아보면 72년 펴낸 그의 첫시집 제목이 '사물의 꿈' 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김병익.김현 등 그의 글벗들과 함께 시집발간 비용을 지원한 선배 고은 시인은 당시 그를 '우리 시대의 한 언어의 정령' 이라고 평했던 터. "큰 머리통에 사자 갈기처럼 터벙한 머리칼, 뒤집힌 다섯모 꼴의 넓적한 얼굴에 왕방울 만한 눈과 약간 꺼칠한 입술…결연하면서도 조금은 흰소리하듯 한 말투와 얼굴을 한껏 펴고 학, 학, 학 하며 터뜨리는 웃음" 에서부터 '정현종다움' 을 찾아 들어간 평론가 김병익씨 역시 "시가 사물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인식" 이야말로 가장 정현종다운 것임을 지적한다.

그런 시인에게 이번 전집이 결코 마침표가 아님은 너무도 당연한 일. 아직도 만년필로 시를 쓰는 시인이자, 숲을 헐어 건물 짓는 대학정책에 앞장서서 반대하는 교수인 그는 "나도 아직 크고 있는 애들" 이라면서 "언제까지나 사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민감할 수 있고 게을러지지 않기를 바랄 뿐" 이라고 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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