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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601.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제13장 희망캐기 36

"이판사판 되면 입장부터 사나워진다는 거 나 혼자만 아는가요?" "이판사판은 하초나 가리며 살게 되었다는 승희가 아니라 빈 창자에서 퉁소소리가 들려도 부둣가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네 신세여. 한일어업협정이란 괴물이 나타난 이후부터 우린 칼도 안 맞고 죽은 목숨 됐뿌렀어. 며칠 전엔 조업 나갔다가 그물질도 못하고 어업지도선 늠들 만나서 칼부림 날 뻔했어. 일본 해역에서 내쫓긴 대형들이 하루 건져 하루 먹는 우리네 조업권에 들어와서 대목장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바다가 미어터져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면 살아남기 급급한 우리네 통통배는 저인망으로 대처할 수밖에 더 있겠나.

우리도 라면이나마 끓여야 묵숨 부지할 거 아녀. 우리네들보고 바다 밑의 자갈까지 싹 쓸어가는 깡패들이라 하지만, 배곯아서 눈깔만 커지는 자식새끼들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뒤집혀 대형만 만났다 하면 그물질은 고사하고 뛰어들어 회를 뜨고 싶은 심정이여. 애당초 그림만 좋았던 생존권조차 박탁당한 지금에 바다 밑을 긁어 아직 눈도 제대로 못뜨는 일년치 갈고(고등어 새끼)나 노가리(명태새끼)를 코꿰어 잡아 올리고 있는 우리네 심정은 오죽 쓰릴까.

제살 깎아 먹고 있다는 것을 무식한 뱃놈들이라 해서 모르고 있을까. 하지만 그거라도 잡아야 당장 입에 풀질이라도 할 거 아녀. 그런데 제살 깎아 먹기도 한술 더떠서 우리네 통통배끼리도 안면 몰수한 지 오래 됐어. 채낚기 드리운 걸 빤히 바라보면서도 그 위에 통발을 치는 놈들은 예사로 볼 수 있게 되었고, 가자미 잡던 늠들이 오징어로 뛰어들어도 삿대질도 못하게 됐어. 매년 이맘때면 물때가 다시 열리는 풍어기여. 그런데 이제나저제나 바닷물은 개좆같이 넘실거리는데, 아모리 그물질을 해도 고기는 간데없어.

그것이 우리네 소형들이 싹쓸이 그물질 때문이라고 헐뜯고 있는가 본데, 우리네 생각으로는 말도 안되는 개수작들이여. 그렇게 만든 늠들은 따로 있는데, 어째 탓을 우리네들에게 돌리는 거야. 비겁한 늠들. "

"그물 한 방에 삼백이니 사백이니 하던 시절, 우리네 평생에는 다시 못 보고 죽을 것 같어. 눈만 큰 자식새끼들 입에 거미줄 칠까 조마조마한 이런 세상 저쪽 어디에는 자식들에게 입히려고 몇백짜리 호피가죽 코트를 일 같잖게 사들이는 부인네들도 있는 모양인데…. "

"설마 자식들 몸뚱이에까지 호랭이가죽 덮어 씌우려고 코트 샀을까. " "아녀. 당사자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는데?" "송아지 삼신이 들었나. 지나간 얘긴 무슨 심술로 게워내 되씹고 그래요?"

"객적은 소리 그만 둬. 엎어져도 자빠져도 여망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우리네가 지나간 얘기 안하면 뭔 소리로 찬바람만 불고 있는 빈 가슴을 달랠거여□ 고등어나 쥐치 가죽으로 코트 만든다는 눈이 번쩍 뜨이는 세상이라도 찾아왔다면 모를까. "

"늦었으니 소득도 없는 넋두리들 그만하고 일어들 서세요. 남의 탓만 하면 뭘 해요. 고기를 잡고 싶으면 강가에 나가 서 있지 말고 집으로 가서 그물을 짜라 했어요. " "방파제로 나가 봐. 켜켜이 쌓여 썩어빠지는 게 그물이여. "

승희가 매몰차게 쏘아붙인다 해도 진작 흩어질 낌새가 아니였다. 더욱이나 승희를 찾아온 사람들이었기에 푸대접할 수도 없었다. 묵호댁은 처음부터 술청에는 코빼기도 내밀지 않아 승희 혼자서 술꾼들 바라지를 감당해야 했다.

출산하면 아이를 승희가 받아 양육하기로 약속한 것이 불과 몇십여분 전 일인데, 대뜸 응석이 불거져 나오고 생색을 부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동이 수상하고 야릇해진 것은 승희도 마찬가지였다. 까닭없이, 그리고 갑자기 승희는 자신이 임신한 것처럼 아랫배가 더부룩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조리대와 식탁을 오갈 때 식탁의 어부들이 수상쩍은 눈길로 바라볼 정도로 배를 내밀고 오리처럼 뒤뚱거렸다. 어쩐 셈인지 승희는 그런 자신이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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