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을 검거했다는 경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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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경찰이 지병으로 숨진 사람을 ‘경찰 사무실에서 조사하다 검거했다’고 거짓 발표해 유족 등이 반발하고 있다.

대전지방경찰청은 지난달 27일 “5200여만원의 국고보조금을 횡령한 혐의로 ‘한국야생동물 보호관리협회’ 간부 구모(60)씨와 최모(55)씨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경찰의 보도자료에는 ‘10월 24일 오전 9시, 조사과정에서 혐의가 드러난 구씨와 최씨를 대전경찰청 수사과 수사2계 사무실에서 검거했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그러나 본지 취재 결과 구씨는 9월 14일 지병으로 충남아산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이 ‘소환해 조사했다’고 밝힌 날은 구씨가 사망한 지 40여 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경찰은 한 번도 구씨를 소환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역 언론과 통신사 등 8개 언론은 지난달 27일 경찰의 수사결과를 보도했다. 뒤늦게 경찰 발표 내용을 접한 협회는 대전경찰청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항의했다. 항의가 이어지자 지난달 29일 경찰은 ‘항의문에 대한 답글’ 형식으로 “보도자료 작성 시 검거 일시와 장소, 검거자 명단을 고인의 이름과 같이 기재해 오해를 불러일으켜 죄송하다”며 “고인의 명예를 훼손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경찰의 답변에는 “고인의 혐의를 확인했고, 이를 포함한 사건의 진상을 명백히 밝히는 게 수사의 목적이라고 판단했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대전경찰청 관계자는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 최씨의 진술과 계좌추적 등 여러 가지 수사기법을 동원해 구씨의 횡령사실을 확인했다”며 "구씨가 주범인 것으로 판단해 관행에 따라 입건한 것으로 처리했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유족과도 원만하게 얘기된 걸 왜 자꾸 협회가 물고 늘어지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고인의 아들(29)은 “1일 49재를 치를 때까지 경찰은 연락 한 번 해오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아들은 “경찰이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구씨와 최씨는 2007년 2월부터 올 3월까지 환경부로부터 지원받은 국고 보조금 5200여만원을 빼돌려 개인 생활비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두 피의자는 협회에서 밀렵 단속을 맡고 있는 간부다. 구씨는 3653만원, 최씨는 1560만원을 횡령했다고 경찰은 발표했다.

그러나 협회의 김철훈 부회장은 2일 “사비를 들이거나 외상으로 겨울철 집중 단속을 하고, 다음해 2월 말이나 3월에 들어오는 보조금으로 이를 처리하는 게 관행이다”며 “경찰이 보조금의 처리절차도 모르면서 무리한 수사를 했다”고 주장했다.

이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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