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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타계한 이후락 전 중정부장 ‘박정희 그림자’ 13년 … 은둔생활 3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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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0년의 군 경력과 10년의 정권 실세, 그리고 30년 가까운 은둔생활.

지난달 31일 85세로 생을 마감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삶은 이렇게 요약된다. 미군정이 운영한 군사영어학교 1기인 이 전 부장은 육군 정보국 차장과 주미대사관 무관 등을 지내며 미국통이 됐다. 5·16 이후 미국의 지지를 획득해 줄 미국 인맥에 목말랐던 박정희는 그가 필요했고,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영입했다. 이후 이 전 부장은 6년간의 대통령 비서실장과 3년간의 중앙정보부장 등 핵심 요직을 거치며 ‘박정희의 그림자’로 살게 됐다.

◆대북 특사의 ‘효시’=“판문점을 넘을 때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다. 평양에서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돌아왔을 때 비로소 아찔했다.”

72년 7월 4일, 이 전 부장이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한 말이다. 그는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장면에서 주연으로 활약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그는 그해 5월 박 대통령의 특사로 평양에서 3박4일간 머물며 김일성 주석을 두 차례 만났다. 성명 발표 당시 이 전 부장이 ‘북괴’ 대신 ‘북한’이란 표현을 쓴 사실이 회자될 정도로 남북의 대치는 극에 달한 상태였다. 평양을 방문하면서 그는 자결용으로 청산가리를 휴대하기도 했다.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훈장을 주고 싶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긴 그는 “(청와대 습격은)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라는 사과도 받아냈다. 이후 당국 간 협의 끝에 ‘이후락·김영주(당시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명의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전 부장의 방북이 이후 장세동(85년)·임동원(2000년)·김만복(2007년) 등 정보기관 수장의 대북 특사 방문의 효시였던 셈이다.

◆축출, 그리고 은둔=이 전 부장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은 두터웠다. 3선 개헌 후폭풍에 그를 주일대사로 보냈으나 1년 후 다시 불러 중앙정보부장에 임명, 김대중(DJ) 후보와 맞붙었던 71년 대선을 치렀다. 당시 ‘박 대통령 대뇌의 반쪽은 이후락의 것’이란 말이 나돌 정도였다. 정보부 비밀팀을 동원해 유신헌법을 만들고, 야당 의원들을 고문하며 정국을 관리한 것도 그였다. 유신헌법에 반대하던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에서 의문사했을 때의 중정부장도 그였다.

‘잘나가던’ 그는 측근에 의해 유탄을 맞는다. 이 전 부장의 오른팔이던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73년 4월, 사석에서 “박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 형님이 해야 한다”고 한 것이 알려졌다. 역린(逆鱗·용의 턱 아래 거슬러 난 비늘, 군주의 노여움을 지칭)을 건드린 대가는 추락의 시작이었다.

조바심이 난 이 전 부장이 73년 8월 DJ 납치사건을 주도했다는 게 정설이다. 98년 미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1973년도 비밀 외교문서’를 통해 이 전 부장이 DJ 납치를 주도했다고 밝혔다. “궁정동 안가에서 이후락 전 부장이 납치 지시를 했다”(이철희 전 차장보)는 진술도 확보돼 있다. 납치사건의 여론이 악화되면서 이 전 부장은 73년 12월 중정부장에서 물러났다.

정권에서 축출된 그는 불교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등을 맡아 종교활동에 전념했다. 78년 제10대 총선에선 고향 울산-울주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고, 공화당에 입당해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12·12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 ‘194억원을 빼돌린 부정축재자’로 몰렸다. 그는 ‘3공 부패의 상징’이 됐고 정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 경기도 하남에 살며 도자기를 굽는 등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내며 은둔해 오다 노환으로 권력무상의 삶을 마쳤다. 김형욱·차지철·김재규 등에 이은 이 전 부장의 별세로 박정희 시대 ‘무소불위’ ‘공작정치’의 대명사가 됐던 권력 실세들이 속속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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