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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의 가사는 중국 선종의 ‘옥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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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 선사의 법통을 이어 받아 중국 선종을 중흥시킨 6대조 혜능 선사(638~713)의 진신상(眞身像). 열반에 든 혜능의 육신을 기초로 전통적인 조형 방법을 동원해 만들었다. 광둥(廣東) 취파(曲法)현 남화사(南華寺)에 모셔져 있다.

중국 불교의 대표 종파는 선종(禪宗)이다. 서쪽에서 왔다는 달마(達摩) 선사가 그 창시자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達摩西來意)…’이라는 화두(話頭)도 있고, 영화 제목도 있다. 그 까닭이야 여러 가지 의미를 띠는 것이라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달마는 여러 곡절을 거쳐 지금의 허난(河南)성 소림사(少林寺)에 정착해 석가모니 부처의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나중에 그의 뒤를 잇는 혜가(慧可)가 찾아 왔다. “제자로 받아들여 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면벽한 채 수도에 열중하고 있던 달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며칠 동안을 기다렸는가 보다. 눈 오는 날 동굴 밖으로 나온 달마의 앞에서 혜가는 칼을 꺼내 자신의 팔을 자른다.

용맹정진(勇猛精進)의 결연한 구도(求道) 자세를 달마 앞에서 표시한 것. 달마는 그제야 혜가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달마는 이승을 떠나기 전 혜가에게 한 벌의 가사(袈裟)를 건네준다. 목면(木棉)으로 만든 가사다. 달마가 인도 지역의 천축국(天竺國)에서 중국으로 건너올 때 가져 왔다는 옷이다. 이로부터 이 가사는 달마에서 시작하는 중국 선종의 법맥을 상징하는 보물이 된다.

그로부터 50년쯤 지났을까. 한 사내가 광활한 중국 불교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 그의 모습은 일자무식의 나무꾼. 집이 가난해 산에서 땔감을 구해다가 장에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던 이 남자 혜능은 어느 날 장터에서 금강경(金剛經) 독송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는 불도를 찾아 나선다. 글자를 깨우치지 못했던 이 사내가 독경 소리 ‘한 방’에 혼을 빼앗겨 불문에 들어서고자 했던 것을 보면 타고난 도력(道力)이 매우 비범했을 법하다.

혜능이 찾아간 곳은 달마와 혜가의 법맥을 계승한 홍인(弘忍)의 문하다. 선종 제5대 조사인 홍인의 밑에서 혜능은 그저 8개월여 동안 묵묵히 잡일에만 몰두한다. 아무도 그의 비범함을 알아채지 못한다. 오직 한 사람, 그의 스승인 홍인만이 그가 중국 선종을 크게 진작할 보물임을 알아본다.

문제는 선종의 창시자 달마 선사가 전해 준 목면가사가 누구에게 전해질까였다. 혜능은 아예 그 대상이 되질 못했다. 홍인의 문하에는 그 법맥을 이어갈 최고의 엘리트로 신수(神秀)라는 인물이 자리를 확고하게 잡고 있었다. 스승 홍인은 둘을 테스트했다. 각자 깨달은 바를 적어서 내라는 것.

둘이 적은 답안에서 홍인의 판단은 굳어졌다. 글자도 모르는 혜능이 옆 사람의 도움을 얻어 적어 낸 글의 내용이 신수의 수준을 훨씬 앞선다는 것. 야밤에 홍인은 혜능을 부른다. 이어 달마 대사와 혜가를 거쳐 자신에게 전해진 목면가사(식기인 발우를 함께 줬다는 얘기도 있다)를 준다. “이것을 지니고 얼른 이곳을 떠나라”는 스승의 말에 혜능은 채비를 갖춘 뒤 부리나케 남쪽을 향해 떠난다.

신수를 옹호했던 그룹의 사람들이 혜능의 뒤를 쫓았다. 그를 죽인 뒤 선종 법맥의 상징인 목면가사를 빼앗기 위해서다. 스승 홍인은 이 목면가사가 사람의 피를 부를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혜능에게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당장 이곳을 떠나라고 했던 것이다. 결국 혜능은 지금의 광둥(廣東)으로 피신해 선종의 전통을 크게 전파한다.

혜능의 문파는 선종의 남종(南宗), 신수는 북종(北宗)을 일으키지만 중국 불교사의 큰 흐름은 혜능에 의해 이어져 지금까지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혜능은 나중에 목면가사를 후학들에게 전하지 않기로 했다. 정통성 시비를 낳는 물건으로 인해 사람의 목숨이 다칠 것을 염려해서다.

중국 불가(佛家)의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일컬어지는 혜능과 목면가사에 얽힌 일화다. 도대체 그 목면가사라는 옷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대단한 스토리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일까. 가사가 지닌 물리적인 가치보다는 그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선종의 창시자 달마가 직접 그 제자에게 내려줘 대를 잇게 했다는 그 상징성 말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옥새와 사슴, 용의 상징성과 같은 맥락이다. 진시황이 만들어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웠던 옥새, 진시황의 사망 이후 중원(中原)의 최고 권력을 의미했던 사슴, 어느 때엔가 만들어져 2000여 년 넘는 시간 동안 중국 왕조사의 최고 권력을 대표했던 용. 그 권력과 권위·표징성이 발휘되는 장소는 달랐지만 중국의 선종이라는 불문에서 줄곧 이어졌던 목면가사의 전통은 이들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중국 불교는 인도에서 들어온 이래 다양한 변화를 겪는다. 경전 해석과 수행 방법 등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는 수많은 종파가 난립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이 혼란스러운 과정에서는 제 나름대로의 맥락과 정체성을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

그를 위해서는 법통(法統), 즉 가장 핵심인 줄기를 제대로 세워 체계를 유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중국 불교의 근간을 이룬 선종의 불문에서는 한동안 이 목면가사가 그 정체성을 유지하는 필수품이었던 셈이다. 이른바 건축 등에서 드러나는 축선(軸線)의 또 다른 표현이다. 요즘 쓰이는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법통’ ‘정통’에서의 통(統)의 개념이다. 전체를 지탱하는 줄기와 근간의 뜻이다.

이 근간을 확립해 보다 완정(完整)한 체계성을 유지하기 위해 과거의 왕조 권력자들은 옥새와 사슴, 용을 만들었다. 중생제도(衆生濟度)의 숭고한 뜻을 펼치려 했던 중국 불교의 선종에서도 마찬가지로 달마의 목면가사를 이용했다. 전체와 부분을 제대로 조합하기 위해서는 근간을 확립해야 한다. 통(統)을 세워서 각을 잡고, 질서를 세워야 한다. 왕조의 권력자, 불문의 법통 계승자뿐이 아니다. 중국 민간의 사회구조에서도 이런 식의 사고는 도저한 흐름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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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국제부·정치부·사회부 기자를 거쳐 2002년부터 5년 동안 베이징 특파원을 역임한 중국통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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