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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입맛 바꾼 20세기 먹거리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3면

'내 한 개 소독저로 부러질지라도/비 젖어 꺼진 등불 흔들리는 이 세상/슬픔을 섞으며 행복보다 맛있는/자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

시인 정호승의 '자장면을 먹으며' 란 시의 일부이다. 시인이 노래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제쳐두더라도 자장면은 지난 한 세기를 대표하는 음식임에 틀림없다.

정호권(68.전 한국식품과학회 회장)식품공학박사는 "개화기.일제시대.6.25전쟁.시장개방으로 이어지는 격변기 한 세월 동안 우리의 입맛도 많이 바뀌었다" 며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장면.소주.사이다.라면.패스트푸드.시리얼 등을 꼽았다.

자장면은 원래 중국 산둥성의 음식. 인천이 개항된 뒤 화교들이 처음 선보였을 땐 현재와 같은 검은 소스가 아닌 갈색 소스였다. 춘장이 쓰이고 감자와 양파, 단맛이 더해지며 '한국적 중국음식' 으로 탈바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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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소스의 독특한 맛에 60~70년대엔 별미음식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지금도 전국적으로 3만여 중국집에서 하루 10억원어치 이상 팔리는 것으로 추산된다.

소주는 암울한 일제시대에 만들어져 서민들의 아픔을 달랬다. 당시 소주는 쌀로 빚어낸 증류식. 가내공업 형태로 전국 수백여 곳에서 생산됐다. 주정을 물에 탄 현재의 희석식 소주는 60년대 중반에 삼학.진로 등이 나서서 만들기 시작한 것. 밀주단속으로 가정에서 술을 빚을 수 없게 된데다 값도 싸 단숨에 서민들을 사로잡았다.

진로가 지난해까지 생산한 소주만도 2홉들이 기준으로 1백95억병. 이 병들을 이어 놓으면 지구에서 달까지 다섯번을 왕복할 거리가 된다.

동국대학교 식품공학과 노완섭(57)교수는 "6.25전쟁으로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던 차에 분유.밀가루가 원조물자로 들어와 우리 국민의 입맛을 변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 말했다.

수제비.칼국수가 식탁에 활발하게 오르내린 것도 이때. 밀가루 음식에 익숙해진 입맛은 라면의 등장으로 인스턴트 식품에 성큼 다가갔다.김용운(60.서울 성북구 동소문동)씨는 "60년대 먹을 게 없어 하루 1~2끼로 때울 때 라면은 한끼를 거뜬하게 해결해 주었다" 며 "지금도 가끔 라면 맛이 그리워 찾게 된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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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 닭고기 국물맛을 선보인 10원짜리 삼양라면이 원조. 65년 정부의 혼분식 장려정책 시작으로 라면은 2년도 채 안돼 월 1백만개가 팔려나갔다. 값도 싼데다 조리하기 간편해 엄마가 돈벌이를 나간 집에서도 아이들끼리 쉽게 끓여 먹을 수 있었기 때문. 어린이.청소년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빙과류의 원조 '아이스케키' 는 전쟁 직후부터 등장했다. 나무꼬챙이에 사카린으로 단 맛을 낸 물을 얼린 아이스케키는 빙과.아이스크림으로 발전해 지금은 연간 1조원의 거대한 공룡시장을 형성했다.

탄산가스를 넣어 달콤하면서 톡 쏘는 사이다는 일제시대 때 일부 만들어졌으나 미군부대 PX에서 흘러나온 코카콜라가 시중에 나돌면서 급격히 퍼져나갔다. 청량음료는 목 마를 때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수시로 마시는 것으로 입맛을 바꿔놓았다.

70년을 전후해 우리의 입맛은 서양식 먹을거리에 차츰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오므라이스.햄버거 스테이크 등 경양식 음식점에서 맛보던 음식은 가정의 식탁에도 하나 둘 오르기 시작했다.금세기 말인 요즘엔 초.중학교의 단체급식의 메뉴로도 즐겨 오른다.햄버거.프라이드 치킨 같은 패스트푸드는 고추장 대신 토마토케첩을 찾게 할 정도로 청소년들의 입맛을 전통음식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식생활 패턴이 변화하면서 '식사〓밥.국수류' 의 개념도 바뀌었다. 밥 대신 시리얼에 우유를 부어 아침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직장인 가운데 야채샐러드나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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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엔 이태리음식과 태국.베트남 등 동남아 음식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어 새 세기엔 이들 국가의 음식이 우리네 입맛의 변화를 주도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가장 바뀌기 힘들다는 입맛도 세계의 입맛으로 변해가고 있다.

유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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