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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 도전현장-러시아] 10. 러,시베리아 자원업고 '동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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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달 29일 동부 시베리아의 중심도시인 노릴스크에는 영하 30도의 혹한(酷寒)이 몰아치고 있었다.

어지간히 추위에 단련됐을 주민들조차 나들이를 삼가 거리에 적막감이 감돌 정도로 대륙의 겨울은 혹독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노릴스크의 공항에는 강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방금 도착한 2대의 자가용 비행기에서 내린 20여명의 독일 비즈니스맨과 이들을 마중나온 40여명의 러시아인이다.

선물보따리를 잔뜩 든 비즈니스맨들은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에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으며 눈썹에는 금세 고드름이 맺혔다.

이들은 마중나온 사람들과 얼굴을 비비며 인사를 하고 보드카 한잔으로 잠시 몸을 녹인 후 노릴스크 니켈. 크라즈.크라스노야르스크-26 등 현지 기업들의 이름이 붙은 버스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갔다.

노릴스크에 위치한 알루미늄 제련회사 크라즈의 직원 드미트리(35)는 "독일과 유럽의 공장.무역회사.원료거래소 책임자들이 시베리아에 있는 러시아의 니켈.팔라듐.알루미늄.우라늄 생산공장에 내년도 물량을 할당받기 위해 왔다" 고 설명했다.

그는 "노릴스크는 물론 중부.동부시베리아의 중심도시인 크라스노야르스크.옴스크.사이얀스크 등지엔 요즘 독일.프랑스 등 유럽과 미국 등 전세계에서 매일 거래사절단이 몰려온다" 고 전했다.

노릴스크에 위치한 노릴스크 니켈사는 전세계 생산량의 20% 이상을 채취, 제련하고 있다.

니켈은 스테인리스스틸, 자동차.전자제품의 부품을 만드는 데 필수적이어서 가장 환금성이 높은 금속이다.

노릴스크 니켈광산 주변에서는 전자산업 등에 쓰이는 다른 고가금속도 많이 생산돼 전세계 팔라듐의 40% 이상, 로듐의 20%, 플라티늄의 24%를 노릴스크 제련소 한 군데에서 생산하고 있다.

팔라듐의 경우 주변 노릴스크 계열 공장들을 전부 다 합칠 경우 전세계 시장점유율의 70%를 장악하고 있다.

또 중부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와 사이얀스크에서 채취해 인근에서 제련하는 알루미늄의 양은 전세계 생산의 15%를 차지한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중심가에서 만난 미 트랜스월드 그룹의 금속거래인인 베이커(32)는 "시베리아의 막대한 광물자원이 국제시장가격을 좌우하기 때문에 연말을 맞아 선물도 전하면서 비위를 맞춰 더 좋은 거래조건으로 더 많은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왔다" 고 말했다.

그는 자동차와 전자산업의 호황으로 이들 고가광물의 수요가 늘어 올초에 비해 니켈(t당 8천달러)과 팔라듐(온스당 4백달러)의 가격이 평균 2백% 이상 올랐으며 전세계적으로 물량확보 경쟁이 치열하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에서 생산되는 광물가격의 인상과 세계 최대규모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석유.천연가스 가격의 상승에 힘입어 올해 천연자원 수출액이 7백억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동토(凍土)의 땅 시베리아는 독일.미국 등 산업선진국의 사절단이 몰려와 몸을 굽신거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엄청난 자원을 갖고 있다.

시베리아 자원도시에 첨단과학도시 건설을 주도해 '시베리아의 천재' 로 불리는 세르게이 카체로프 크라스노야르스크 대외경제국장은 "옛 소련의 붕괴로 몰락한 러시아 경제가 부활을 노릴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 천연자원에 있다" 고 지적했다.

옛 소련 지도층은 60년대부터 시베리아와 극동의 개발, 자원활용에 미래가 달려 있다고 보고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고속화 계획^노보시비르스크와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아카뎀고로독(과학도시) 건설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등 극동 주요도시 현대화계획 등을 추진했다.

시베리아 현장에서 자원과 과학기술의 개발, 산업화를 동시에 추진해 극동을 통해 아시아국가들과 연결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특히 노보시비르스크 인근의 아카뎀고로독은 수많은 과학기술개발을 이룩하는 선도적 역할을 했고 옛 소련의 개혁.개방정책을 입안하기도 했다.

신동진(新東進)정책으로 불리는 이 프로젝트는, 그러나 80년대 들어 국제적인 저유가와 광물가격 인하로 결국 좌절됐다.

카체로프 국장은 "이제 천연자원 가격의 상승으로 러시아가 물실호기의 발전기회를 잡았다" 고 주장했다.

그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밑천으로 냉전기간 중에 키워놓은 과학기술 인력, 과거 군사용으로 개발했던 첨단기술이 3박자를 이뤄 21세기형 첨단산업을 일으켜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세계시장으로 진출하는 그날 러시아는 다시 대국으로 일어날 것" 이라고 강조했다.

시베리아의 중심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는 고르바초프가 88년 한국과의 수교가능성을 처음으로 밝혔던 곳으로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통해 한국.일본.중국의 막대한 생산력 및 시장과 결합하는 교두보와도 같은 곳이다.

이제 시베리아의 천연자원을 발판으로 삼아 러시아는 아시아와 연결되는 새로운 산업국가로의 발전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카체로프 국장은 "정보통신의 21세기에도 결국 산업의 기초는 에너지와 자원이다.

뛰어난 천재들과 과학기술.자원의 3박자가 갖춰진 나라이기에 21세기에 러시아의 부활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 자신감을 보였다.

김석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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