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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편의 詩만 남긴 이한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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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호 10면

1976년 7월 14일 일본 도쿄의 한 병원에서 췌장암으로 투병 중이던 이한직 시인의 타계 소식이 전해졌다. 젊은 세대에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이한직은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우리 시단을 화려하게 장식한 시인이었다. 이한직은 1939년 초 문예지 ‘문장’이 창간되면서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을 통해 등단한 몇몇 뛰어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때 이한직과 함께 등단한 시인이 조지훈·박두진·박목월· 박남수·김종한 등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이한직의 나이가 가장 어렸다. 그는 18세로 경성중학(지금의 서울고교) 재학 중이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38>

데뷔 이후 몇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이한직은 ‘조숙한 천재’로 불릴 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대 법학과에 진학하고 뒤이어 학병으로 징집되면서 그의 작품은 대할 수 없게 되었다. 해방 직후 을유문화사 편집책임자였던 조풍연이 ‘문장’ 추천 동기 시인들의 공동시집 발간을 구상하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시인이 이한직이었다. 하지만 이한직은 아직 학병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으며 김종한은 타계, 박남수는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조지훈·박두진·박목월 3인의 ‘청록집’으로 발간할 수밖에 없었다.

1921년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난 이한직은 그의 부친이 일제 때 중추원 참의 경북지사 총독부 학무국장 등 요직을 거친 친일파의 거두였다는 사실을 평생 족쇄처럼 떠안고 살아야 했다. 박두진은 이한직이 집안의 그런 배경 때문에 늘 쓸쓸해 보였고, 우수와 공허감이 서려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술만 마시면 자조적으로 ‘나는 친일파’라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되뇌었고, 시 쓰는 일의 부질없음을 한탄하곤 했다. 역시 ‘문장’ 출신의 소설가인 최태응은 이한직을 가리켜 ‘시를 쓰기에는 너무 정직하고 염치를 아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시를 쓰지 않는 대신 문단 활동에는 열성이었다. 해방 후에는 청년문학가협회의 창립에 깊이 간여했고, 6·25전쟁 중에는 문인으로 종군해서 공군 소속 창공구락부의 멤버로 활약했다. 그 뒤 한국시인협회 창립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무엇보다 이한직의 공로로 꼽아야 할 것은 1950년대 중후반 ‘문학예술’의 시 추천을 담당하면서 뛰어난 시인을 여럿 배출했다는 점이다. 신경림·박성룡·인태성 등이 그들이다.

문학을 떠난 이한직의 삶도 그리 평탄치는 못했다.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말 이한직은 피난지인 부산에서 당시 부통령이던 김성수의 딸과 결혼하지만 이한직이 친일파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장인인 김성수는 결혼식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처가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는 바람에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50년대 중후반에는 종합교양지 ‘전망’을 발행하는가 하면, 미도파 옆에서 ‘마로니에’라는 다방을 운영하기도 하지만 그의 어려운 삶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했다.

이한직에게 얼마간 서광이 비칠 기미가 보인 것은 4·19 이후 장면 정권이 들어서면서 주일대표부 문정관으로 임명돼 일본에 건너가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안정된 삶에의 희망도 1년을 못 넘겼다.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이한직은 당시 이철승·양일동 등 일본에 체류 중이던 정치인들과 함께 쿠데타 반대 성명을 발표해 입국 금지조치를 당한 것이다. 60년대 후반부터 금족령이 풀려 이따금 한국을 방문했으나 영구 귀국할 의사는 없어 보였다. 그는 이미 일본에서 전자공업 관련 업체를 설립해 사업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한직이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해 연말 김윤성·구경서·조병무 등 후배 시인들은 그가 남긴 21편의 시를 모아 유작시집 ‘이한직시집’을 출판했다(신경림은 시집에 실린 21편 외에 4·19를 노래한 ‘깨끗한 손을 가진 분이 계시거든’과 ‘진혼의 노래’ 등 2편이 더 있음을 확인했다). 이 시집에서 박두진은 추모의 글을 통해 ‘문학과 시를 위해서만이라도 자신의 운명과 전력을 투입해 싸울 수 있는 모험만 했더라면 훨씬 그의 인생은 적극성을 띠었을 것’이라고 애석해 했다. 박목월은 추모시의 후반에서 이렇게 읊었다.

‘입 가장자리로 댕겨 문/ 그의 미소/보일 자에게만 보여준/ 그의 눈웃음/ 프랑스의 조숙한 천재 랭보는/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지만/ 겨우/ 20편의 작품을 남긴/ 그 준엄한 결백성/ 그는 갔지만/ 한국 시사에/ 그 이름 이한직’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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