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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찔한 절벽, 일렁이는 파도 위의 티샷 웟슨의 용기로 링크스에 맞섰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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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호 16면

턴베리 코스 안의 전쟁기념비에서 바라본 턴베리 등대와 화산섬 아일사 크레이그. 턴베라는 2차대전 중 연합군 비행장으로 사용됐다.

9번 홀, 시그네처 홀이다. 나는 블루 티를 지나 챔피언 티로 갔다. 턴베리에서 열린 오픈(브리티시오픈)을 보면서 가장 서 보고 싶던 곳이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바다를 건너 티샷을 해야 한다. 페어웨이 왼쪽엔 등대와 스코틀랜드 왕 브루스의 성(城) 잔해가 있다. 챔피언 티에서 페어웨이까지는 약 200야드, 발 아래 파도가 넘실거릴 때마다 내 심장의 피도 함께 출렁거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만큼 다리의 힘이 빠졌다. 낭만적으로 보였던 등대는 바로 앞에 다가서자 돈키호테를 공격하던 풍차처럼 위압적으로 변했다.

성호준 기자의 스코틀랜드&웨일스 투어 에세이 ④ 턴베리<하>

나는 동반자 웟슨을 생각했다. 웟슨이 원래 멘털이 강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골프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있던 선수였다.

클럽하우스에는 웟슨의 1977년 우승 초상화가 걸려 있다. 턴베리 호텔의 웟슨 스위트 숙박료는 77년을 기념, 770파운드(약 151만원)다.

1975년 마스터스 마지막 날, 웟슨은 니클라우스와 한 조에서 경기했다. 당시 니클라우스는 현재의 타이거 우즈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가진 선수였다.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웟슨은 16번 홀에서 두 차례 공을 물에 빠뜨리고 쿼트러플 보기를 기록했다. 반면 니클라우스는 이 홀에서 버디를 잡고 우승했다.

이 전에도 웟슨은 중요한 순간 무너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하는 심약한 선수라는 평이 따랐다.

턴베리 아일사 코스 1번홀 티잉그라운드에 선 필자.

1977년 마스터스 마지막 날도 상황은 비슷하게 돌아갔다. 웟슨은 챔피언조였는데 바로 앞조에 있던 니클라우스가 12번 홀에서 공동 선두로 쫓아왔다. 니클라우스는 13번 홀에서 다시 버디를 잡았다. 그러곤 웟슨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웟슨은 격분했다. 니클라우스의 행동을 ‘할 수 있으면 너도 해보라’는 조롱으로 해석했다고 한다. 이후 상황은 예상 시나리오와는 반대로 움직였다. 웟슨은 그 홀에서 버디를 잡았고 결국 우승했다.

바로 다음 메이저대회인 77년 오픈에서 그는 니클라우스와 맞대결(Duel in the sun)을 벌여 다시 이겼다. 한 조에서 서로의 눈을 보면서 이긴 승리라 더 의미가 있다. 스포츠 심리학자들은 그의 분노가 주홍글씨를 떼는 계기가 됐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웟슨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좀 안정됐다. 나의 티샷은 페어웨이에 들어갔다. 간신히.
등대와 무너지는 성, 아일사 크레이그, 바다 사진을 찍느라 즐거웠으나 5온 2퍼트, 트리플 보기를 했다. 블루 티가 아니라 챔피언 티에서 쳤으니 한 타 빼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웟슨이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았다. 스코어카드에 7을 적었다.

바다를 끼지 않은 12번 홀부터는 성적이 나아졌다. 목숨을 걸고 파세이브를 한다는 생각에 파와 보기를 번갈아 했다. 웟슨과의 게임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느꼈는데 17번 홀 페어웨이 벙커에서 세 번 만에 나오면서 공까지 잃어버리는 바람에 다시 궁지에 몰렸다. 이때까지 스코어는 86타.

남은 건 한 홀, 파를 잡으면 내가 이기고 보기 이상이면 진다. 이 홀의 이름은 마침 듀얼 인 더 선이다. 웟슨과 나의 짜릿한 진짜 승부가 이 홀에서 벌어질 참이다. 긴장감 속에서 친 티샷은 내가 봐도 멋졌다. 웟슨이 움찔했을 것 같다. 스트로크 세이버(야디지북)를 펴 보니 남은 거리는 140야드였다.

올해 오픈 마지막 홀에서 웟슨은 8번과 9번 아이언을 두고 고민했다. 결국 8번으로 쳤는데 그린을 맞고 크게 튕겨 에지까지 가는 바람에 우승을 놓쳤다. 나는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정확히 8번 거리였다. 중국인들이 8을 좋아하는 것처럼 8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클럽이었다.

그런데, 캐디백에 8번 아이언이 없었다. 클럽을 챙겨주는 한국의 캐디에 익숙한 내가 클럽을 어딘가에 흘리고 온 모양이었다. 무작정 돌아갈 수도 없었다.

나는 골프장에서 특히 덤벙댄다. 6번 아이언을 쳐야 할 때 9번 아이언을 친 적도 몇 차례 있고 구두를 신고 티잉 그라운드로 나간 적도 있다. 그러나 이런 내 성격이 턴베리에서처럼 한탄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 가장 중요한 클럽을 잃어버린 나는 7번과 9번을 놓고 고민해야 했다.

“9번을 쳤어야 했다”는 웟슨의 말이 생각나 그렇게 했는데 역시 무리였다. 짧은데다 약간 페이드가 걸려 오른쪽 에지에 걸쳤고 보기로 끝났다. 91타, 나의 듀얼 인 더 선은 1타 차 패배로 끝났다.

나는 홀에 핀을 꽂은 후 보이지 않는 나의 파트너와 악수를 했다. 누군가 봤다면 미친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다.

클럽 하우스엔 1977년 듀얼 인 더 선의 웟슨 사진이 여럿 붙어 있었다. 와인 향이 그윽한 위스키 매캘란을 앞에 두고 아일랜드해를 바라봤다.

아이러니를 느꼈다. 웟슨은 스코틀랜드의 링크스를 매우 사랑했다. “링크스는 불규칙한 바람과 평탄하지 못한 페어웨이와 그린 등으로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기는데 인생도 그렇다”고 그는 말했다. 링크스도 웟슨을 좋아했다. 그의 메이저 8승 중 5승을 링크스에서 얻었다.

그러나 올해 링크스는 웟슨을 외면했다. 마지막 홀에서 그의 샷이 평범하게 튀어 그린에 멈췄다면 그는 60세 메이저 우승이라는 골프 사상 최고의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샷이 아주 부정확했던 것도 아니었다. 서로 존경했던 링크스와 웟슨의 특수 관계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포용해 줄 만한 샷이었다. 그런데 불규칙한 턴베리의 그린은 그의 볼을 내쳐 버렸다. 웟슨은 이런 예상치 못한 일들 때문에 링크스를 사랑했는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승을 못했다.

잭 니클라우스는 그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골프는 공정하지 않고 그 사실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 골프가 어려운 이유다.” 완전하지 못한 골프와, 허점투성이의 세상을 향한 니클라우스의 한탄이다.

그런데 웟슨은 올해 오픈에서 우승을 놓친 후 기자회견에서 “장례식도 아니지 않으냐”면서 툭툭 털고 나갔다.

나의 라운드에서도 아이러니가 있었다. 경기에 지고도, 나와 골프를 함께 시작한 MFS 8번 아이언과 이별을 하고도 만족스러웠다는 것이다. 베스트 스코어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의 영웅과의 라운드였으니 생애 최고 라운드였다. 예쁜 미술 교생 선생님의 얼굴은 잊었지만 턴베리와 나의 동반자 웟슨은 잊지 못할 것 같다.

클럽하우스엔 윈스턴 처칠의 사진이 나를 보고 있었다. 시가를 피우는 그의 사진 위에 그가 골프에 대해 정의한 말이 써있었다. “골프란 아주 작은 볼을, 그 목적과 아주 부적합하게 디자인된 무기로 아주 작은 구멍에 쳐 넣는 매우 기이한 게임이다.” 그 위에 “네가 골프를 알아”라고 덧써놓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클럽하우스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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