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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시대를 앞선 조선 선비, 백정의 딸에게 청혼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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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날개도 없이 어디로 날아갔나
정약용·김려 원작 김이은 글
이부록 그림, 알마, 142쪽, 9500원

두 편의 조선 후기 한문 서사시, 정약용의 ‘도강고가부사(道康瞽家婦詞·팔려 간 신부)’와 김려의 ‘방주가(蚌珠歌·방주의 노래)’를 한글로 옮겨 풀어쓴 책이다. 여성 문제, 평등 의식, 계급 갈등, 농민과 어민의 고난, 양반과 백정의 혼인 등을 바라보는 시각이 당시로선 파격적이다.

‘팔려 간 신부’는 화자인 ‘나’ 정약용이 1803년 유배지인 전남 강진에서 직접 본 사연이라고 한다. 주정뱅이 아비가 중매쟁이에게 속아 열열덟살 어린 딸을 마흔아홉 먹은 ‘장님 점쟁이’에게 시집보낸다. “그 넓디넓은 논은 장인 될 사람에게 줄 테고, 돈도 장인 될 사람에게 모두 준다고 했다오”란 말에 넘어간 것이다. 남편의 폭력과 전처 자식들의 구박에 시달리는 어린 신부. 결국 집을 나와 비구니가 되지만, ‘관아와 짬짜미가 있는’ 남편이 관아에 고발을 했고, 사령들이 바람보다 빨리 쫓아와 신부를 잡아갔다. 봉건사회 속 강자 대 약자의 처지를 선명하게 드려낸 작품이다.

한편 ‘방주의 노래’는 좀 더 밝은 이야기다. 여느 양가집 규수보다 반듯하게 자란 백정의 딸, 방주가 양반의 청혼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특히 방주 아비의 심성을 곧고 선하게 묘사한 부분이 이채롭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온화하면서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어려서 어미를 잃은 딸 방주를 늘 “우리 방주, 우리 방주”하며 예뻐하며 키웠다. 당시 가장 천하다 멸시받았던 백정을 이토록 존경스런 인물로 묘사하다니. 신분을 개의치 않는 평등사상이 깔려 있는 설정이다. 이는 방주 아비에게 사돈을 맺자 청한 종4품 무관 장 파총의 말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이치는 고르고 가지런해 원래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이 없다”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누구도 공격하지 않으면서 불합리한 신분제도를 아프게 꼬집고 있으니, 시대를 앞서간 지식인의 통찰력이 놀랍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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