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백기완의 노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 30년 전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가고, 100년 전 안중근 장군이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렸던 지난 26일. 대학로의 후미진 골목길에 위치한 원더 스페이스 세모극장이라는 곳에서 매우 특이한 공연이 있었다. 다름 아닌 ‘노래에 얽힌 백기완의 인생이야기’였다.

# 백기완. 1970, 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은 결코 낯설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젊은이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러나 “그건 내 이름을 모르는 게 아니라 오늘의 현실, 역사를 모르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백기완! 시대의 양달만을 보고자 하는 이에게 그의 존재는 없다. 그는 늘 시대의 응달에 서 있었기 때문에.

# 그는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그늘에 가리고 땅에 묻힌 무지렁이들의 말들을 캐내서 그 누구보다도 우리말에 더 많은 숨을 불어넣었다. 동아리·새내기·새뚝이 등은 그가 만들어 퍼뜨린 순우리말이다. 그는 가난했다. 그러나 가난을 외면하기보다는 가난한 이들의 맘을 알고 그들의 아픔에 함께 울고 분노하며 한 살매(=한평생)를 질펀하게 살아왔다.

# 공연할 무대 왼편에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는 법이다”는 글씨가 걸려 있었다. 백기완에게 혁명이란 거창한 사회주의 이론을 떠벌리는 것이 아니다. 그저 무지렁이 같은 이들의 불난 속이 내뿜는 ‘불쌈’일 뿐! 무대 위 조명이 어두워지며 영화 ‘말아톤’의 정윤철 감독이 직접 제작했다는 영상이 틀어졌다. 백기완은 말했다. “내 별명이 ‘딱서니’야. 좋은 건 좋은 거, 나쁜 건 나쁜 거, 미운 놈은 밉고 고운 놈은 곱고. 딱 그거지. 그래서 딱서니야. 덕분에 평생 요 모양 요 꼴로 살았지 뭐.”

# 백기완이 무대로 걸어 나왔다. 그는 “길을 잃었을 때마다 노래를 불렀다”며 헤어진 지 64년이 넘어 이젠 그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엄마 생각에, 장질부사에 폐병까지 겹쳐 다 죽게 된 아들에게 “고기 한 점 먹으면 다 나아” 하며 고기 구하러 간다 하곤 열흘 보름 종무소식이었던 아비 생각에, 시래깃국에 조밥을 숭숭 말아 먹고서도 달리기 1등 하면 곡마단 구경시켜 주고 솜사탕 사달라고 조르던 철없던 여동생 생각에, 함께 통일운동하던 장준하가 죽은 후 “준하는 어찌하고 혼자 왔느냐”며 “죽은 장준하를 업고 오든 통일을 업고 오든 하라”고 호통치던 술집 여주인 생각에 갈라진 목을 쥐어짜며 노래하고 또 했다. 일흔이 훌쩍 넘어 여든을 향해 가는 백기완이 마치 길을 다시 찾으려 몸부림치듯….

# “아 나에게도/ 회초리를 들고 네 이놈/ 종아리를 걷어 올리거라 이놈/ 그러구선 이 질척이는 항로를/ 살점이 튕기도록 내려칠 그런/ 어른이 한 분 계셨으면….” 백기완은 이 시 한 편을 목청 다해, 온몸으로 읊고서는 무대 한복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내 머리를 움켜쥐듯 쓸어 올렸다. 그 순간 관객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너나 할 것 없이 불러 젖혔다. 백기완, 그가 직접 지은 곡이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불뚝 일어서 팔을 쳐들고 함께 불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백기완. 그는 깨지고 부서졌을지언정 결코 지지 않았다. 그는 늙고 지쳐 주저앉았을지언정 결코 잘못 가지 않았다. 권력과 분열에 취한 양달의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그가 평생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던 민중과 통일의 응달진 삶의 가치를! 정말이지 이명박 대통령이 백기완을 만나길 바란다. 그리고 그의 질펀한 욕 한 그릇 안주 삼아 요즘 다시 유행한다는 막걸리 한 사발 거나하게 나누길 권한다. 그래야 양달이 응달의 아픔을 알지 않겠나.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