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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법고창신(法古創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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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현재 우리사회는 세계화의 거센 파고 속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 1년이 지나면서 세계가 단일경제권으로 통합되는 시점에서 우리가 살 길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잘 사는 방법을 경제적인 잣대로만 재온 결과 총제적 난국에 직면했다면 이제부터는 오히려 그 반대쪽에서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은 18세기 선각자 박지원(朴趾源)이 설파할 말이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이니 옛것을 익히고 나아가 새로운 것을 안다는 논어(論語)의 '온고이지신(溫故以知新)' 보다 적극적인 의미다.

'온고이지신' 이 옛것을 알아야 새로운 것에 대한 분별력이 생긴다는 앎의 문제라면 법고창신은 옛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실천의 문제다.

박지원은 조선고유문화가 만개한 진경(眞景)문화의 절정에서 다음 시기의 쇠퇴를 예상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한 선각자답게 문장론을 빌려 법고창신을 제창한 것이다.

그는 지나치게 옛것에 매달리면 때묻을 염려가 있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점에만 매달리다보면 근거가 없어 위험하다고 부연 설명했다. 법고(法古)에만 치중해 옛것에 얽매이면 고루해지고 창신(創新)에만 정신을 쏟다보면 정체불명의 근본없는 얼치기가 돼버림을 경계한 것이다.

옛것을 본받는 일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은 동전의 앞뒤와 같이 맞물리면서 균형을 이뤄야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1894년 갑오경장으로 조선사회가 서구화되는 시점에서 또 하나의 변신으로 나타났으니 구본신참(舊本新參)의 논리다. 옛것을 근본으로 해 새로운 것을 참고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옛것이란 조선의 전통적인 문물이고 새로운 것은 서구문물을 일컫고 있다. 이는 조선문화를 근본으로 삼되 서구문화를 참고하겠다는 정도의 함의를 갖고 있었으니 적극적인 창조의 논리가 개입된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자세였다.

이 시기는 개방과 자기보존의 두 방향을 두고 치열한 노선투쟁이 전개된 시기로 주체적인 노선 정립을 못한 상태에서 외세에 의하여 개방 쪽으로 선회한 때였다. 우리 나라는 역사적으로 전환기마다 이 두 노선이 치열하게 부닥치면서 상호 역할분담과 시대적 사명을 다해 왔다.

우수한 외래문화는 전통문화라는 거름종이에 걸러 수용했던 것이다. 19세기 말에는 우리의 의지대로 주체적.선별적으로 필요량만큼 외래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데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또 그 수용대상인 일본화한 서구문화가 전통문화보다 우수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과학기술문명과 경제우선주의의 하부구조에 중점을 둔 서구문물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장치가 됐지만 우리 사회의 비인간화에 결정타를 먹였던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생존전략으로 유의할 점은 외래문화의 무분별한 수용과 그에 따른 일방통행의 모방을 경계하고 고급 전통문화의 현대화작업에 힘쓰는 일이다.

우리만의 색채감각과 인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전통문화의 강점을 살린 문화상품을 법고창신의 정신으로 개발해내야 한다. 그래야만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다.

최근 서울대 규장각에서 옛 지도로 달력을 만들어낸 작업을 예로 들어보자. 옛 지도의 형태를 원전 그대로 살리되 디자인과 색감을 최대한 현대화해 현대인의 미적 감각과 취향에 맞췄다. 옛 지도의 예술성을 살리되 거기에 담겨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달력으로서의 실용성까지 곁들여 일석삼조 효과를 냈다.

그리하여 누가 봐도 전통문화의 향기가 물씬 묻어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의 디자인과 색채감각이 이를 받쳐주어 고졸하면서도 품격 높은 고품질의 문화상품으로 탄생한 것이다.

결국 우리 시대의 과제는 주체적이고 선별적인 외래문화수용의 자세에 있고 그 종착역은 법고창신에 귀결된다 하겠다.

법고창신은 상학(上學.정신적 측면)과 하학(下學.물질적 측면)에 모두 적용될 수 있다. 21세기 우리 나라의 르네상스를 이루기 위한 문화운동의 기준은 법고창신의 정신에 둬야 하며 그 회귀점은 18세기 조선문화 전성기인 진경시대 이외의 선택은 없다. 세계화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전략의 열쇠도 거기에 들어 있다.

정옥자(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규장각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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