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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아침] 박팔양 '태양을 등진 거리에서' 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나는 오늘도

단 하나밖에 없는 나의 단벌 루바쉬카를 입고

황혼의 거리 위로 걸어간다

굵은 줄로 매인 나의 허리띠가

퍽도 우악스러워 보이는지

뿔떡 독일종 강아지가

나를 보고 쫓아오며 짖는다

'짖어다오 짖어다오!'

내 가슴의 피가 너 짖는 소리에

조금이라도 더 뛰놀 것이다

나는 또 걷는다

다 떨어진 병정구두를 끌고

태양을 등진 이 거리 위를

휘파람을 불며 걸어간다

-박팔양(朴八陽.1905~?) '태양을 등진 거리에서' 중

19세에 신춘문예에 당선,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나왔다.

그 뒤로 국내외 언론계에 있으면서 동반자 계열의 시인이었다.

태양을 등진 거리란 물어볼 것 없이 일제 암흑기 그것이다.

그 때 외투 한 벌, 헌 구두 한 켤레면 도시의 인텔리겐치아로서는 댄디였다.

강아지 한 놈에 대고 '짖어다오' 를 연발함이 좀 겸연쩍다.

절망도 때로 사치였던가.

해방 직후 월북, 지금 그는 생사불명이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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